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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단골식당 / 박경대

단골식당 / 박경대



                    

화면 가득히 탁자가 보인다. 앵글은 허름한 술상 위의 막걸리 주전자와 놋쇠 잔을 훑는다. 화면이 바뀌자 카메라는 쓰러져가는 건물들과 좁고 긴 골목을 따라 천천히 움직인다. 설명도 없이 우울한 배경음악을 깔고 비치는 영상이 호기심을 부른다. 무슨 내용인가 궁금했는데 종로에 있는 피마 이 재개발로 없어진다며 취재하는 중이었다.

조선시대에 지체 높은 양반이 말이나 가마를 타고 궁으로 행차를 하던 길이 지금의 세종로이다. 피마 골은 그 길을 따라 나있던 뒷골목으로 평민들이 지체 높은 양반의 행차와 마주치기 싫어서 피하는 길이라 하여 피마 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골목에는 예전부터 선술집이 많았다고 한다. 궁에서 근무를 마친 문무백관이 퇴근을 하면서 간단하게 한 잔씩 하였다는 그곳에는 오래된 내력에 걸맞게 긴 세월을 이어온 식당이 여럿 있었다.

노인 한분이 오십 년 단골집이고 처음 술을 배운 곳이라며 한 곳을 소개하고 있었다. 리포트가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단골이 되었느냐고 질문을 하였다. 그분은 별다른 말씀이 없이 특별히 음식이 맛있거나 깨끗한 곳도 아니지만 그냥 정이 간다면서 젊은 시절의 추억담을 늘어놓았다. 피마 골이 그처럼 오랜 세월 이어져 온 것은 아마도 주머니가 가벼운 술꾼들이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는 그 골목의 분위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리고 보니 나도 자주 드나드는 단골식당이 서너 군데 있다. 그곳은 당연히 식사를 위주로 영업을 하는 곳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는 대부분 술을 마시려고 들린다. 주량은 많다 할 수 없지만 즐겨 마시는 편이다. 젊은 시절 한때는 매일 술집을 순례하고 다니기도 했다. 요즘 들어 아침마다 운동을 다녀도 줄어들지 않는 배 둘레가 그 시절에 줄기차게 마셨던 술 때문이 아닐까하고 추측해 본다.

대봉동 향교 근처에 자주 가는 식당이 있다. 그곳에는 테이블이 달랑 세 개뿐이고 점심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비워져 있다. 조용한 것이 마음에 들어 언제나 두 시를 넘겨 찾아간다. 그곳에서는 항상 라면을 안주삼아 막걸리를 먹는데 내가 생각해도 막걸리가 반주인지 라면이 안주인지 판단하기 힘 든다. 다만 손님들의 눈이 따가워 아무도 없는 시간에 가는 것을 보면 라면이 안주인 것 같다.

점심시간을 넘기고 늘 혼자 와서 라면 한 그릇과 막걸리 한 통을 먹고 가는 내가 주인의 눈에는 궁금하게 비추어졌던 것 같았다. 비가 오는 조용한 오후 어느 날, 아주머니가 나에게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어 보았다. 갑작스런 질문에 얼른 대답이 생각나지 않아 그냥 얼버무렸더니 말은 하지 않아도 그냥 백수로 아는 것 같았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상태로 벌써 십 년 단골이다. 그곳에서 먹는 라면과 막걸리 한 통이 배도 부르고 맛이 있어 자주 들린다.

반월당 근처에 20여년을 꾸준히 다니는 H라는 옥호를 가진 식당이 있다. 도청에 근무하는 S형의 소개로 알게 된 곳으로 자그마한 몸집의 아주머니가 솜씨 있게 안주를 만들어 내는 작은 가게이다. 예전에 그곳에 오는 손님들은 대부분 주머니가 가벼운 화가나 시인 등 예술가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모두가 단골들이었다.

S형은 늘 맥주를 마셨기에 나도 그곳에 가면 도리 없이 맥주만 마시게 되었다. 혹 다른 친구와 가더라도 나에겐 묻지도 않고 맥주를 내어 놓는 바람에 그곳에서는 항상 맥주만 마신다. 별로 취하지도 않는 맥주다 보니 과하게 마시는 경우가 많았다. 외상이야 잘 해 주지만 맛있는 안주도 여럿이라 주머니 사정을 헤아려 들리는 편이다.

최근에 그곳이 방도 들이고 탁자도 늘리며 확장되었다. 물론 축하할 일인데 손님도 바뀌고 분위기도 바뀐 탓인지 왠지 예전만큼 자주 가진 않는다. 그곳은 가끔 아내와도 같이 가는 곳이기에 나를 대충 알고 있는 단골집이다.

늘 소주만 마시는 곳도 있다. 북성로에 있는 M식당으로 오랜 전통이 있는 돼지국밥집이다. 수육이 소주와 잘 어울리지만 한편 생각해도 신기한 게 집집마다 마시는 술의 종류가 다르다는 것이다. 손님들이 대부분 소주를 마시는지라 나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 같다. 좋은 인상의 주인은 육십 대 후반으로 부부가 식당을 꾸려가고 있다. 점심때를 지나 오후 느지막이 가면 늘 먹는 대로 수육 반 접시에 소주 한 병을 내어놓는다. 주문하지 않아도 알아서 내어주는 것이 대접받는 느낌이다. 이곳도 드나든 지 십 년정도 되었다.

빈대떡이나 풋고추를 보면 막걸리가 생각나고 땅콩이나 마른 오징어에는 맥주가 제격인 것처럼 술에도 궁합과 분위기가 있다. 식당에 따라 한 가지 술을 마시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피마 골의 그 어르신처럼 나도 분위기를 많이 타는가 보다. (2010.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