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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봄날은 간다 / 김창석

봄날은 간다 / 김창석


 

 

따뜻한 봄날이다. 휴전협정 64년을 기념해 그날의 흔적을 찾아 흑백 사진 한 장 가슴에 품고 철원으로 떠났다. 한반도에서 아픈 역사의 현장 아닌 곳이 있을까마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가장 가까이 겪었고 현재도 진행 중인 곳이라 감회가 남달랐다.

그날도 이렇게 하늘이 맑았다. 아버지는 이웃 마을에 다녀오듯 봇짐 하나 매고 떠났다. 그 뒤 포화에 실어서 행방불명 통지서 한 장 보내고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청춘을 원망과 통한으로 허비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으나 아직도 그 자리는 헛헛하다. 사진 속 아버지는 이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덤덤하게 웃고만 있다. 포화 속으로 쿵쿵 발걸음을 울리며 걸어간 후 한 번도 변하지 않은 미소다. 그 미소를 가슴에 품고 역사의 현장으로 향한다.

한 서린 격전지는 휴전이란 미명 속에 잠들고 있었다. 민통선 북쪽의 평야 지대는 70여 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서 자연 그대로의 힘을 간직하고 있다. 관목과 초지가 경쟁하듯 어우러져 오롯이 남아 있다. 그런 까닭에 세계 환경운동가의 눈이 쏠리고 있다. 하지만 아는가? 고즈넉한 자연의 숨결 그대로의 삶에 가려진 철원은 우리 민족의 애환이 가장 많이 서려 있는 곳이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연이 수풀만큼 빽빽하다.

백마고지 전적지와 DMZ의 분단 실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역사의 현장, 한탄강 둘레길이다. 곳곳이 지뢰 지역으로 숨겨진 포성이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땅에는 동족끼리 총칼을 겨누며 긴장의 끈을 팽팽히 당기고 있음에도 하늘에는 학들이 한가롭게 날갯짓 하고 두루미, 기러기, 철새들이 군무를 춘다. 우리가 뼈아픈 과거를 잊지 않는다면, 아무리 핵으로 무장한 채 위협하기를 일삼는다 하더라도 결국은 그들 스스로 포기하게 되리라고 역사는 말하고 있다.

백마고지! 어린 시절부터 참 많이 들었던 명성이다. 그러나 이름 같지가 않다. 포성과 화염이 걷히고 풀뿌리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오롯이 알몸으로 드러난 산세가 말을 닮아 백마고지다. 기상이 묻어난 이름이 아니라 슬픔이 담겼고, 죽음의 화염과 지옥의 유황을 품어내며 이 땅의 청춘을 희생으로 만들어낸 이름이다. 중국군 3개 사단과 한국 보병 제9사단 간 피아 30만 발이라는 상상조차 가늠할 수 없는 포탄을 온몸으로 받아낸 땅이다.

2만 명의 젊은이를 죽음으로 몰아간 그 피맺힌 역사의 현장에 섰다. 주인이 스물여덟 번이나 바뀐 고지, 오래도록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올려다보았다. 눈앞에 잔상을 빌어 아버지가 나타났다. 알 듯 모를 듯 고개를 끄덕인다.

땅굴, 북괴의 남침용 땅굴이다. 2의 한국전쟁을 위해, 또다시 젊은 생명을 담보로 죽음의 굿판을 벌이고자 미쳐 몸부림치는 자가 만든 땅속의 길이다. 얼마나 많은 생명을 담보로 여기까지 왔던가? 얼마나 많은 죽임을 위해 이토록 날뛰는가? 2의 땅굴은 올해로 발견 42주년이다. 그곳에 우리 국군 여덟 명의 전사자가 추모비에 아로새겨져 있다. 매년 4월 마지막 금요일이면 그들이 구름으로 바람으로 살아나 가슴을 적신다. 진혼鎭魂, 당신들의 주검이 헛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우리는 그들을 달랜다.

경원선의 간이역 월정역, 남한 한계선과 접한 지점에 처연한 몸짓으로 그날의 아픔을 낱장으로 전하고 있다. 객차 잔해가 눈에 들어온다. 서울과 원산 사이를 얼마나 숨 가쁘게 달리며 철원의 농산물과 원산의 해산물을 실어 나르는 간선 철도 역할을 다했던가. 이제 긴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달릴 그날을 기다린다. 세월이 흘러 청춘이 아님에도 우리네 가슴에서 사라지고 있는 그날의 아픔을 전하려고 지칠 줄을 모른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 분단 민족의 한을 이보다 더 절절히 표현할 수 있을까. 목청 높여 달리는 과거 속 그 날의 철마를 상상하며 자유롭게 넘나드는 새들이 부럽다.

가지고 간 빛바랜 사진을 품속에서 꺼내 아버지를 다시 생각한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더 큰 사랑으로 우리의 찬 가슴을 데워주실 때, 홀로된 어머니는 늘 긴장으로 사셨다. 아버지를 앗아간 전쟁에서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는가. 역사는 진행형이다. 전쟁의 화마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파란 하늘에 새털구름이 한 줄로 늘어졌다. 지금 팽팽한 활시위의 긴장된 평화를 누리고 있음을 잊지 말라고 한다.

돌아서는 발길, 문득 누군가의 입에서 시작된 노래가 흐른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 산 제비 넘나 도는 서낭당 길에 /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철원을 배경으로 한 봄날은 간다의 구성진 노래 가락이 철원 높은 고갯마루를 넘어 갈 때쯤, 모두가 하나가 되어 웅얼웅얼 따라 하기 시작했다. 늘어지고 늘어졌다. 마치 가는 세월에 점점 잊히는 역사의 현장을 대신해 구슬피 우는 듯했다.

발아래 툭툭 건드리며 아는 채하는 이름 모를 꽃가지가 반갑다. 그날의 아버지 발자취도 어느 기슭 어느 강가, 어느 풀숲에서 자라고 있을 것이다. 분단의 현장에 꽃들은 피고 지는데, 해마다 봄날은 오는지 가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