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모차의 여인 / 존 버거
런던 옥스퍼드 광장. 구십 년대의 어느 하루. 정확한 나이를 가늠하기는 어려웠지만 아마 마흔다섯쯤 되었을까. 여인은 슈퍼마켓에서 몰래 빼낸 듯한 쇼핑 수레에 소지품을 싣고 천천히 도로를 따라 가고 있었다. 마치 아이가 실려 있는 유모차를 내려다보듯, 고개를 숙인 채 수레를 밀었다. 수레 속의 소지품은 비닐봉지에 담겨 있다. 머리에 스카프를 둘렀는데 그 위로 또 털모자를 썼다. 러시아 말로 샤프카라 불리는 모자였다. 털이 듬성듬성 빠진 모자였다. 누빈 윗도리에 바지, 그 위로 흙빛의 인조털 코트를 걸쳐 입고 있는 여인은, 멀리서 보면 마치 에스키모 같았다. 신발만은 에스키모와 달리 미국 스타일의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가 한동안 지내셨던 핼럼가(街) 근처 뉴캐번디시 거리의 쓰레기통에서 여인이 주운 것이었다.
런던 지하철역에서 새로운 설비가 들어섰다. 승객이 앉아서 기다리던 벤치들을 없애고 대신 비스듬히 서서 몸을 지탱할 수 있는 일종의 횟대 모양의 버팀대를 설치한 것이다. 노숙자들이 더 이상 벤치에 누워 잠들 수 없도록 한 탁월한 구성이었다. 여인은 이제 밤이면 역의 아스팔트에 두꺼운 판지를 깔고 옷을 입은 채 잠이 든다. 어머니도 그러셨지만, 밤이면 발이 부어오르기 때문에 신발 끈은 느슨하게 풀어두어야 했다.
한낮이다. 옥스퍼드 광장 너머 보행자 구역에는 비둘기들이 수백 마리씩 모여 있다. 샤프카를 쓴 여인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비둘기들이 종종걸음으로 날아오르면서 여인 쪽으로 몰려든다. 여인은 모티머가(街)의 한 식당에서 얻어 온 묵은 빵을 검은 비닐봉지에서 꺼내더니 잘게 부수어 비둘기들을 향해 뿌려 주었다.
비둘기들이 여인의 팔위로 날아올라 앉고 어떤 놈들은 머리 위에서 맴돌며 날았는데 대부분은 땅에 떨어진 빵 조각을 쪼아대고 있었다. 여인은 때때로 무심한 듯 부스러기 빵 조각을 자기 입으로 가져가곤 했다.
어렸을 적, 집 뒤뜰엔 새들이 멱을 감을 수 있게 돌확이 놓여 있던 기억이 난다. 혹독히 추웠던 어느 겨울, 당시 지금의 저 여인 나이 또래였을 어머니는 매일 자작나무 사이로 내린 눈을 헤치고 뒤뜰로 나가, 돌확의 꽁꽁 언 물 위에 빵 조각을 놓아 두셨다. 마테를링크가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 역시 새들은 죽은 이들이 전하는 소식을 가져온다고 믿고 있었다.
여인은 새 한 미리를 손에 올려놓더니, 머리를 흔들고 팔꿈치로 쳐내면서 다른 새들을 쫓았다. 여인이 가슴께로 올려 안은 그 새는, 털이 군데군데 빠지고 탁구공보다 좀 더 작은 둥근 머리는 털이 반쯤 벗겨져 대머리가 되어 있었다. 빵 부스러기를 주었으나 받아먹지 않았다. 여인이 다른 비닐봉지에서 무언가를 뒤직이며 찾았다. 그것은 우유가 조금 담긴 아기 젖병이었다. 비둘기의 입을 벌리더니 부리 속으로 몇 방울을 떨어뜨려 넣었다.
날마다 옥스퍼드 광장으로 오기 전, 여인은 하루도 빠짐없이 이 대머리 비둘기의 젖병을 준비했고, 다른 비둘기들에게 빵 부스러기 모이를 준 후엔 어김없이 이 대머리에게 우유를 먹였다.
옥스퍼드가(街)에 쇼핑 나온 한 무리의 사람들이 멈추어 서서 샤프카를 쓴 이 여인을 바라보고 있다.
노숙자 여인이 그 대머리 새에게 말했다. 글쎄, 두꺼운 벽 너머에 숨겨져 있는 것을 저들이 볼 수 있을까. 하지만 이 풍요한 정원을 꼭 보고 싶어 한다면 보도록 내버려 두지 뭐.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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