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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남해 물미해안 / 정목일

남해 물미해안 / 정목일  

 

 

 

남해 물미해안에 와서 파도가 쏟아내는 말을 듣는다.

태고의 그리움이 밀려와 가슴을 적셔주는 바다의 말이다.

문득 바다를 보고 싶을 때 남해군 동면 물건마을에 간다. 초승달 모양의 물미해안이 펼쳐진 모습이 그리움을 품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쌓아놓은 두 개의 방파제가 타원형으로 뻗쳐 있다. 바다 전망을 보면서 '물건마을'의 방조어부림으로 발길을 옮긴다. 지척에 바다를 둔 숲속 길은 절묘한 산책로이다. 논밭으로 밀려오는 파도를 막기 위해 조성한 이 숲은 수백 년 전에 조성되었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산책하기는 이 숲만 한 곳이 어디 있으랴 싶다.

물미해안 숲속으로 혼자 걸어간다. 이 곳 수백 년 수령의 나무들과 처음 만난다. 바람과 눈비 속에서도 생명을 키워온 삶의 모습들이다. 나무들마다 눈 맞춤으로 첫 만남의 인사를 나누며 걷는다. 바다를 바라보고 수백 년 파도소리를 들으며 자란 나무들이다. 휘어지거나 구불구불 치오른 모습을 보여준다. 바닷가 숲속으로 난 구불구불한 길을 걸으며, 고목古木들과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눈다. 거목巨木들에 비하면 인간은 작은 아이처럼 보인다. 하늘로 치솟은 나무들이 품은 목리문木理紋엔 천 년 바람의 음향과 햇살의 체온과 빗방울의 무늬가 수놓아져 있으리라.

여름의 끝 무렵이지만, 숲속 길 위로 낙엽이 떨어져 있다. 숲속 사방에서 새들이 지저귄다. 사람이 출현했으니, '조심하라'는 신호음이다. 새들에겐 숲속 침입자가 된 셈이다. 조용하던 숲속을 시끌벅적하게 만들어 버려 미안하기도 했다. 숲속 여기저기서 무슨 새인지, 주고받는 신호음이 왁자지껄하게 울려 퍼진다. 숲속의 평온을 깨트려 놓은 셈이다. 미안한 생각이 들어 발걸음 소리를 줄인다. 수백 년 자란 나무들과 만나며, 휘어지고 구불구불 치오른 모습들을 본다. 나무들이 뻗어 오른 선형線型을 살피며, 나이테에 새겨 두었을 세월과 삼의 체험들을 생각해 본다.

구불구불 곡선을 그으며 치올라 간 몇 백 년 넘은 팽나무, 쥐똥나무들을 본다. 숲속에서 가지들이 서로 구부러지면서 조화를 이뤄낸 모습에 감탄하고 만다. 수백 년이 지난 나무들은 저마다 가슴 속에 수백의 나이테를 그려놓았을 터이다. 오래 된 거목일수록 삶의 무게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숲속 한 곳에 자리 잡아 뿌리를 박고서, 수백 년간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어 갔을 거목巨木들을 생각한다. 비쩍 마른 몸매로 구불구불 치솟은 모감주나무, 푸근하고 넉넉해 보이는 푸조나무, 하얀 밥알을 단 이팝나무, 귀신에 홀린 사람을 나무로 만든 몽둥이로 때려 귀신을 쫓아냈다는 무환자나무들에게 목례를 보낸다. 거목들을 보면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며 숲길을 지나친다.

바닷물과 바람을 막기 위해 옛 선조들이 조성한 천 년의 방풍림을 걸으며 무한의 바다와 하늘과 만난다. 생명의 숨결로 달려오는 바닷바람이 내 얼굴을 휘감으며 스쳐가곤 한다. 여기에 와서 천년의 파도와 바람을 온몸으로 만난다.

숲속에서 나오면 '물미해안'이다. 해변에는 수억 년 세월에 깎이고 다듬어진 몽돌들이 널려 있다. 파도가 칠 때마다 돌들이 수없이 바다 속으로 밀려갔다가 해안으로 나오면서 깎이며 다듬어져 몽돌이 되어 널려 있다. 방풍림防風林 밖으로 나지막한 산, 그 너머 '마안도馬鞍島'가 보인다. 말의 안장처럼 생긴 모습을 보고 지은 이름이다. 말을 타고 바다를 달리는 광경을 떠올려 본다.

수백 년 방풍림과 물미해안. 방파제와 등대 뒤쪽으로 다도해多島海가 희끄무레 보인다. 바다, , , 하늘이 기막히게 어울린 선경仙境이다. 반원형의 내항內港에 방파제가 양쪽으로 뻗어 바닷물을 막아주고 있다. 방파제 끝에 1개씩 등대가 세워졌다. 내항엔 고깃배들이 10여 척 정박해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남해 물미해안은 바다, 하늘, , 숲이 어우러진 절경絶景, 대자연의 안식처인 듯싶다. 인위적인 장식이나 치장이 없다. 맑고 푸른 태고의 공간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이따금 잊혀지지 않고 마음속으로 물미해안 절경이 펼쳐지며 파도소리가 들려오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