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대하여 / 최장순
낡은 구두 뒤축처럼 노곤한 몸이 한 방향으로 기울어진다. 아침에 세웠던 각角이 마모된 저녁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도 되는 시간, 스쳐 보낸 것들을 차분히 매만진다. 생각의 올이 다 드러날 것 같아도 쉽사리 헤어 나올 수 없다. 고갈된 에너지는 어디서 충전할까. 한낮의 게으름을 털어낸 고양이가 경계의 눈빛을 지피며 담을 건너뛴다.
말줄임표가 길게 점을 찍는, 피로가 어깨를 눌러도 안도를 담고 돌아가는 늦은 오후와 밤사이쯤의 시공간. 낮과 밤을 가르는 노을은 잃어버린 용기와 믿음과 희망을 되찾는 시간이다. 이성이 땀을 흘린 낮을 지나, 자신을 가다듬는 감성의 시간. 저녁은 타인의 세계에서 오롯이 나의 세계로 접어든다.
“됐다, 됐어. 그만하면 됐다.”
노을빛 풍경이 상처 입은 하루를 다독인다. 내일 또다시 고개가 꺾일지라도 달려온 시간에 쉼표를 찍어야 새로운 음표를 그려낼 수 있듯, 내일의 태양을 기대하는 시간이다.
이삭줍기를 마친 이들에게 집은 숙소 그 이상이다. 설사 기형도의 슬픈 시, ‘빈집’이라 해도 집은 세상을 버텨내는 공간, 마음의 뿌리다. 저녁을 잃어버린 삶은 불안하고 서럽다. 둥지를 잃어버린 새, 배고픈 길고양이, 종이박스를 들고 쉴 곳을 찾는 노숙들에게 저녁은 쓸쓸한 시간이다.
서둘러 돌아가려는 듯 태양은 산 너머로 뚝 떨어진다. 그 짧은 순간, 참고 견딘 피곤과 허기가 몰려온다. 차창 너머 빌딩 사이로 내려앉는 노을은 산등성이로 떨어지던 허기진 노을과 달리 온몸을 달아오르게 한다. 모든 인위人爲는 노을빛에 묻힌다. 황홀의 극치다. 그 충만함 속에 내가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저녁은 고개를 숙인다. 노을이 내려앉은 강가엔 바람을 입은 갈대가 고개를 숙이고, 밀레의 만종처럼 고개 숙인 가로등은 하나 둘 저녁을 밝힌다. 하늘과 강이 한 호흡으로 물드는 시간, 금빛풍경 속으로 서서히 어둠이 스며든다.
마지막 불꽃을 보여준 희열이 고조되는 순간, 시간은 멈추고 고여 있던 근심도 사라진다.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다. 왜 이 순간 눈물이 나는 것일까. 슬픔과 무관한, 울컥 떨쳐버릴 수 없는 그 무엇. 다시 모여드는 가족들, 마음이 붉다. 둘러앉아 시청하는 행복이 겹다.
도시는 고요히 불을 밝히고 창문은 호박등처럼 빛난다. 같은 해가 뜨고 지는 지루한 일상이지만 저녁은 매번 다르게 다가온다. 어둠 스며드는 쓸쓸함도 힘이 되는 저녁. 내일을 꿈꾸며 깃드는 저녁은 신이 내린 아름다운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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