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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모과와 장미 / 한경선

모과와 장미 / 한경선

 

 

 

마침 엘리베이터가 내려온다. 쫓기는 시간이니 일 분이라도 아껴야 하지만 잡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보낸다. 일층까지 내려간 것을 확인하고서야 버튼을 누른다. 내가 타고 내리는 동안 누구도 타지 않기를 바라며 바뀌는 숫자를 지켜본다. 전기를 낭비한다는 가책이 슬쩍 지나가지만 일층까지 내려가는 동안 아무도 마주치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재빨리 공동현관문을 나선다.

일찍 집을 나와서 저녁에 들어가다 보니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을 모른다. 나 없는 사이에 이사를 들고 나는지, 자세히 안 봐서 그러는지 마주치는 이들이 늘 낯설다. 눈을 마주칠 때 목례를 하거나 인사말을 건네는 사람들과는 짧은 인사를 나누지만 대부분 굳은 얼굴로 시선을 피한다. 좁은 엘리베이터에서 잠깐 숨 쉬는 것이 불편하다.

요즘 아파트살이가 그러려니 하지만 적어도 옆집과는 친밀하게 지내고 싶었다. 이사를 가서 그 집에 인사를 하러 갔다. 두어 번 가서 초인종을 눌렀지만 만날 수 없어 그만뒀더니 첫 만남을 서로의 집 현관 앞에서 어정쩡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단감을 나눠 먹으려고 용기를 내어 초인종을 눌렀다. 인기척이 없었다. 문 앞에다 쪽지를 붙인 봉투를 놓고 왔는데 그다지 반가워하지도 않을 것 같고, 괜한 짓을 한 것 같아 다시 그럴 일은 어니다 싶었다.

곱상하고 젊은 옆집 안주인과 내가 공교롭게 동시에 현관문을 열고 나설 때가 있다. 그는 내가 인사를 채 하기도 전에 목례를 하는 듯 마는 듯 놀란 토끼처럼 문을 닫고 들어간다. 자연스럽게 말을 건네며 어색한 것을 극복하려던 마음이 엉긴다. 그 뒤에도 아파트 앞에서 몇 번 봤는데 그 사람인지 아닌지 확신할 없을 만큼 빠르게 스쳐갔다. 내 눈을 피하는 것으로 미루어 옆집 안주인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마부칠 때마다 서로 가시에 닿은 듯 놀란다. 나는 그 사람처럼 겉으로 내색을 하지 않을 뿐이다. 대인기피증이 나보다 더한 사람인가 보다. 사람한테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른다고 혼자 생각한다.

이층에 사는 여자를 안다. 그는 엘리베이터를 같이 탈 때나 공동현관문 앞에서 마주치면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먼저 말을 건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웃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말을 붙인다.

시골 동네에 시도 때도 없이 대문을 들어서는 사람이 있었다. 방문도 거침없이 열었다. 동네에 사고 싶은 집은 언제든지 가고 쓸데 있는 참견과 쓸데없는 참견을 모두 했다. 발음이 어눌해도 큰 소리로 당당하게 말했다. 동네 사람들은 그런 그를 집에 못 오게 하거나 불쾌해 하지 않고 웃으며 받아줬다. 동네 대소사에는 약방의 감초 같은 역할을 했고 밥을 잘 못 먹는 환자나 혼자 사는 노인들에게 별식을 해서 먹이곤 했다. 청각장애가 있는 그가 이해를 못 해서 엉뚱한 말을 옮기기도 했지만 그가 가진 온기를 사람들이 알아주었다. 그때는 집집마다 속사정이 빤히 보이는 담 너머로 제각기 다른 사람 냄새가 넘나들었다.

이층에 사는 그이는 혼자 사는 듯하다. 허름한 옷차림에 꺼칠한 얼굴이 눈을 붙잡는다. 밥은 챙겨 먹는지 관리비는 어떻게 내는지 궁금하다. 그렇지만 물어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