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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고추 훔치는 여자 / 왕린

고추 훔치는 여자 / 왕린

 

 

 

좋은 일이 생겼다는 선배가 밥을 사는 날.

맛있게 먹어 배부르다며 하나둘 뒤로 물러앉는다. 그러기를 기다린 듯 나는 테이블 쪽으로 다가앉아 고양이가 생선 접시 넘겨보듯 상 위에 남은 고추를 흘금거린다. 허물없는 이들과 밥을 먹을 때 거르지 않는 탐색 행위다. 팔을 저쪽 고추를 챙기고, 바구니 속 상추까지 들춰 탱탱하고 싱싱한 고추를 찾아낸다. 너스레를 잘 떠는 이가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아니, 자기는 고추를 너무 밝히는 것 아냐?”

빈 접시가 들썩거리게 일제히 웃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무신경이다. 그래, 나는 고추 훔치는 여자다. 김동인 소설 <감자>의 복녀는 남편이 게을러터져 칠성문 밖 빈민굴로 쫓겨나 온갖 품팔이를 하고 왕서방네 감자를 훔쳤다지만 내 남편은 게으르지도 않고 지금도 직장에 나가 꼬박꼬박 월급도 타온다. 그럼에도 나는 고추만 보면 손이 작동한다. 남은 고추를 싹쓸이하여 가방에 넣고 씨익, 웃으면 상황 끝이다.

처음부터 남의 고추를 탐내는 여자가 아니었다. 얼결에 고추 서리를 목격하고 나서부터다. 아니지, 고추 서리에 끼고부터라고 해야 맞겠다.

 

생일을 핑계로 친구 넷이 바람도 쐴 겸 토종닭 백숙을 먹으러 갔을 때 일이다. 두 시간쯤 달려 도착한 백숙집은 비탈이 심한 언덕바지에 있었다. 예약하려고 전화했을 때 고추밭 옆에 차를 세워두고 걸어서 오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주인은 고추를 따다 깜빡했다며 우리를 보고서야 닭을 잡겠다고 올가미를 챙겨 들었다. 밭일에 진이 빠졌는지 마냥 느그적느그적이었다. 표정도 썩 달가워 보이지 않았다. 우리를 일없이 맛집 순례나 하는 여자들 취급하는 눈치였다. 그녀에게는 고단한 삶의 현장인 그곳, 특별할 것도 없는 주변 경치에 카메라부터 들이대며 호들갑을 떨었으니 그럴 만도 했으리라. 괜스레 머쓱해진 우리는 백숙이 준비되는 동안 울안밭으로 들어가 주인이 따다 만 고추를 땄다.

닭백숙이 나왔을 때는 산봉우리는 자줏빛으로 물들고 하늘은 노을에 젖어 불그스름했다. 백숙은 소문만큼 맛있지 않았다. 해가 저문 것을 보자 운전 서툰 친구 차에 얹혀 갈 일이 심란해서 그랬는지, 기운 펄펄해서 줄행랑치던 놈이 벌거벗고 납작 엎드려 있는 게 처연해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길을 나선 우리는 백숙을 멋있게 먹지 못한 것은 별일도 아닌 양 석양빛 받으며 고추 딴 이야기에 흥이 올라 있었다. 고추를 따준 것이 당연하다는 듯, 고추를 좀 주기는커녕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더라는 한 친구의 투정을 듣기 전까지는. 어지간히 철딱서니 없는 여자들이었다. 거저 얻으려 말고 금방 딴 물고추 두어 근이라도 사줬더라면 주인 얼굴이 환해졌을지 모를 일인데, 고추씨만큼 거들어놓고 생색이나 냈으니 말이다. 해가 지는 고추밭 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였다고 입을 모을 때는 어둑해진 가풀막 내려오는 것쯤 일도 아닐 것 같더니, 못 얻은 고추에 화살이 꽂혀 툴툴대는 사이 길도 어둠도 타박건더기로 변해 있었다.

어둠은 한적하고 외진 곳일수록 더 빠르게 스미는 것일까. 차를 세워둔 고추밭 옆에 도착했을 때는 온통 먹물을 뿌려 놓은 것 같았다. 친구 얼굴도 분간이 되지 않자 문득 어둠 속이 무서워졌다.

차에 오르기 전 한 친구가 화장실 타령을 하며 주춤거렸다. 그냥 가자 어쩌자 실랑이하던 우리는 울레줄레 밭고랑을 따라 들어갔다.

볼일을 봤으면 얼른 나올 일이지, 그새 어둠에 익었다고 고추를 눈에 들였을까. 여자들 견물생심에 어쩌자고 주변 어둠까지 거들어 눈 감아 주었을까. 친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추를 따기 시작했다. 새가슴인 내가 얌치깨나 있는 듯 어서 나가자고 하자 보다 못한 한 친구가 쐐기를 박았다.

안 내키면 나가서 망이나 보든가!”

망보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밭골을 빠져나왔다.

어둠이 익자 저만큼에 우뚝한 게 드러났다. 몸 부풀린 멧돼지 같았다. 덮쳐오면 어쩌나, 바잡을수록 조바심은 더했다. 발밑이 축축해졌다. 바짓가랑이 속으로 무언가 스멀스멀 기어들어 오는 것도 같았다.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돌아봤다. 건들거리던 꽁무니바람 등판을 치고 달아나고, 새들의 짝 찾는 소리가 귀에 파고들었다. 그만 나오라고 기껏 지른 내 목소리는 어둠이 삼켜버렸다. 친구가 쓴 모자의 푸르스름한 야광 테두리만 도깨비불처럼 흔들렸다. 으슬으슬 한기가 느껴져 그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차 안으로 들어가 얼마를 더 있었을까. 친구들이 눅눅한 냉기를 몰고 돌아왔다. 한 친구가 점퍼의 지퍼를 내렸다. 와르르 쏟아져 나온 고추들. 새파르족족한 게 암팡져 보이는 놈, 푸르댕댕해서 다부진 놈, 시붉어 옹골진 놈.

바리 허리춤 안으로 점퍼를 질러 넣고 고추 따 넣을 생각을 어찌해냈는지. 내 가슴은 두방망이질인데 친구들은 자드락밭에 차돌 굴러가듯 웃어댔다. 밤말은 뒤가 듣는다는데 그 야살스러운 신바람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 걱정도 저절로 올라가는 내 입 꼬리를 잡아 내래진 못했다. 겁먹고 도망간 사람이 고추는 더 많이 가져갈 거라고 놀리는 말에도 실실 웃음이 나왔다. 오늘 밤 꿈에 얼마나 시달리게 될지 기대가 된다는 말을 시작으로 질펀한 야설을 흘려대느라 한강을 지나친 것도 몰랐다.

 

살면서 어떤 순간을 놓친 적이 있다. 쭈뼛거리고 뒷걸음치고 지레 겁을 냈다. 담 넘어온 홍시 하나, 임자 있는 오리 하나 따먹어서는 안 되는 줄 알았다. 그날도 친구들이 대담하게 고추 서리를 할 때 난 동동 거리기만 했다. 그 아쉬움이 자꾸만 나를 부추긴다. 그때 따 보지 못한 고추를 식당 상 위에서나마 손에 넣어 보려고. 풋고추 붉은 고추 가릴 것 없이 눈에 띄면 쥐었던 주먹이 풀려 갈퀴가 된다.

사실 나는 툭 베어 물면 혀에 감기는 알싸하고 풋풋한 맛 때문에 고추를 좋아한다. 매큼 달큼 상큼한 게 앉은자리에서 예닐곱 개는 먹어야 직성이 풀린다. 먹는 것에 욕심 없는 내가 음식점 고추만 보면 노렸다가 집어 온다. 하필 왜 고추냐고 묘한 웃음을 흘리며 나를 불온한 여자로 몰아대는 친구도 있다. 글쎄다. 그녀의 말대로 잠재의식 속에 나도 모르는 불온함이 숨어 있는지도.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란다더니, 옛말 틀린 게 하나 없다. 어쩌다 보니 친구들의 고추 서리를 만천하에 고자질해버렸다. 훤한 대낮에 사람들 보는 앞에서 고추를 훔치는 뻔뻔한 이 여자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