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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차작(借作) / 하병주

차작(借作) / 하병주  

 

 

 

글이 마음대로 써지지 않을 때는 참 안타깝고 답답하다. 받아놓은 원고 청탁서의 마감일은 바짝바짝 다가오는데 머릿속에는 써야할 글에 대한 아무런 얼개도 되어 있지 않으니 짜증이 나고 절망감을 느낄 때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원고를 못 보낸다고 통지할 수도 없는 일. 심하게 아파서 입원했다거나 도저히 글을 쓸 수 없는 불가항력의 사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명색 작가로서의 자존심이 그걸 허락지 않는 것이다.

하도 답답하고 급하다보니 이럴 땐 누구에게 차작借作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하고는 혼자서 실소를 짓고 만다. 차작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남의 손을 빌려 물건을 만듦 또는 그 물건 글을 대신 지음 또는 그 글'이라고 되어 있다. 소위 글 쓴다는 사람의 할 짓이 아니요 그러느니 차라리 절필絶筆을 하고 말 일이다. 잠깐이라도 그런 생각을 했다는 자체가 부끄럽고 나의 글재주 빈약함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하기야 남에게 부탁해서 글을 받아 써먹는 행위는 그나마 조금쯤 애교스러운 면이 있다고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국내 유명작가의 표절사건이라든지 또는 제자의 글에 몰래 자기 이름을 붙여 발표해서 말썽이 된 일도 있지 않은가.

차작에 대한 얘기를 하려니 아련한 옛날 기억이 떠올라 감회가 새롭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우리 집 아래채에는 한문 서당이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집안 아이들에게 한문 공부를 시키려고 독서당獨書堂을 차렸던 것이다. 독서당은 훈장 선생님 모시는 비용을 단독부담으로 하여 자기 집안사람들만을 가르치기 위한 서당이다. 하지만 우리 집에서는 동네 아이들이 배우겠다고 찾아오면 다 받아 주어 학동學童 수가 10여 명쯤 되었다. 나는 학교에 가는 시간을 재외하고는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했는데 그때 차작이란 말을 처음 알았다.

당시 서당에서 점심식사 후에 훈장님이 운자韻字를 내주어 시를 짓게 하는 시간이 있었다. 운자를 받은 학동들은 각자 조용한 곳을 찾아 눈을 감고 심각하게 시상에 잠기지만 한시 짓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흔한 일은 아니었으나 여기에서 암암리에 차작이 행해졌다. 이제 겨우 동몽선습童蒙先習이나 명심보감明心寶鑑 정도를 배우는 아이가 소학小學을 읽는 상급 학동에게 부탁해서 받은 시를 자기 자작인 양 훈장님 앞에 내놓는 경우가 있었다. 차작이란 원래 이런 경우에 쓰는 말인데 이와는 상관없는 이야기 하나가 있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오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웃기만 할 수도 없는 딱한 사연이다. 당시 훈장님은 칠순에 가까운 연세로 학문이 깊고 인격도 갖춘 유학자로서 지방에서 대단히 존경받는 분이었다. 큰 부자는 아니어도 물려받은 전답이 꽤 많아 생활이 어렵지 않고 자족할 정도는 되었다. 훈장을 생업으로 하는 게 아니어서 어렵게 모셔왔다는 말을 들었다. 그분에게 다른 걱정은 없었으나 오직 아들 하나 없는 것이 한이었다. 딸만 셋을 낳은 부인이 일찍 타계하여 홀몸이 되자 아들을 얻으려고 새 여자를 들였다고 했다. 어른들에게 얻어들은 바로는 논 두 마지기를 주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가난한 집 처자를 데려왔다는 것, 그러나 아들은 고사하고 그때까지 딸 하나도 낳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어느 날, 글을 읽다가 쉬는 시간에 이런저런 한담이 오가던 중 훈장님이 웃으면서 한 마디 했다.

"차작이라도 해서 아들 하나 낳았으면 좋겠다만, 허허."

당시 어린 나로서는 그 말의 확실한 의미를 잘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훈장님은 참으로 눈물겹도록 간절한 소망이었던 것이다. 설령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었다 해도 평소 해픈 농담을 잘 하지 않는 분이 얼마나 아들을 바랐으면 그런 말까지 했을까.

지극정성으로 원하면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는 것인가. 우리 집 독서당이 문을 닫고 나서 얼마 후였다. 간절한 소망이 삼신할머니에게 통했을까? 훈장님이 아들을 얻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그 말을 듣자 우리 아버지는 마치 자신의 일인 양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글을 쓴다는 게 참으로 어렵다. 갈수록 더욱 어려워진다. 남들이 보기에는 기껏해야 원고지 20매 이내의 짧은 글 하나 쓰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엄살이냐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범상한 내 머리로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좋은 글은 잘 나오지 않는다. 어쩌다가, 아주 드물게 만나는 '잘 쓴, 좋은 글'을 읽게 되면 무척이나 부럽고 질투가 나기도 한다. 난들 이런 글을 왜 못 쓰겠느냐 하고 호기豪氣를 부려보지만 호기만 가지고 될 일이 아니다. 글은 잘 되지 않고 머리만 지끈거린다. 그럴 때는 내 몸 어디에 스위치라도 있어 누르기만 하면 국수 뽑는 기계에서 면발 나오듯이 좋은 글이 술술 나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러나 설령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런 글은 서푼의 가치도 없을 터, 좋은 글이란 역시 피나는 노력의 산물로 작가의 혼이 깃든 작품이 아니랴, 그러니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혼신의 힘을 다 하고 습작을 많이 하는 수밖에 어떤 뾰족한 방법도 없을 것 같다.

지금 당장 만족할 만한 글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절망만 할 일은 아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쓰고 또 쓰고, 심혈을 기울이다보면 언젠가는 당당하게 내놓을 수 있는 작품 하나 나오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