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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눈길 / 서민용

눈길 / 서민용


 

 

 

밤새 하얀 눈이 소복이 내렸습니다. 첫새벽, 아무도 걷지 않은 순백의 눈길을 아이와 함께 나섰습니다. 부자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눈 위에 첫 발자국을 찍으며 나아갔습니다. 애비는 일부러 아이가 걸어 간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을 밟고 가기도 했습니다. 이따 돌아올 때, 이 발자국을 보면 어떨까도 생각해보았습니다.

낼 모레, 아이는 떠납니다. 이 나라를 떠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갑니다. 새로운 인생을 찾아 미지의 세계로 나아갑니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멀리, 아주 멀리 캐나다로 직장을 찾아 떠납니다.

어젯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부자상봉이 있었습니다. 아이는 긴 여행을 떠나기 전에 못난 애비에게 마지막 인사라도 하려고 내려왔습니다. 못난 애비는 아이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아이도 애써 외면하는 듯 했습니다. 할머니와 대화를 하면서 애비에게 할 말을 할머니에게 했습니다.

외가에서 용돈을 구하던 일이며, 이번의 여비도 아르바이트를 해서 마련했다는 말을 할머니에게 자랑하듯 했습니다. 못난 애비에게 손 벌리지 않고 혼자서 여비를 구했다는 것이지요. 애비는 소주잔만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 애와 헤어진 것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였습니다. 가정이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깨어지니 모든 것은 힘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애비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야인(野人)인지 기인(奇人)인지 모를 인생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애비는 가끔 돈이 생기면 학비라고 보태주었지만 손가락이 남을 정도로 밖에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 애의 삶, 대목 대목에 애비는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식장에 가서 새 아버지와 나란히 사진을 찍어준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 후로는 한 번도 졸업식에 가지 못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기회가 있어 한번 찾아갔었습니다. 멀리서 동생과 엄마와 새 아버지가 나란히 그 애 주변에 서 있는 것을 바라보고 그만 발길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아이는 그래도 애비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늘 애비를 이해한다고만 했습니다. 애비는 그것이 그 애의 진심인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애비를 용서하려 애쓰는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그 애가 군대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서해안 멀리 연평도 옆 대청도에서 신병생활을 하는데 연평해전이 일어났습니다. 애비는 애를 태우며 안부를 기다렸습니다. 얼마 후 전화가 왔습니다.

아빠도 군대생활 무사히 하셨는데 제가 못할 게 뭐있겠어요?”라고 애비를 안심시켰습니다. 그 때 알았습니다. 그 애는 애비를 불쌍히 여기고 있었던 것을.

그 애는 애비 어미를 경멸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학 전공을 정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졸업 후 호주나 캐나다 같은 곳에 가서 임플란트 회사에 다니며 정착하고 싶어요. 우리나라를 떠나고 싶어서요.”

오죽하면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곳에 가서 살고 싶을까요. 그때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애 사주를 풀어보니 과연 평생 외롭게 살 팔자였습니다. 또 현침살(懸針殺)이 많아 뾰족한 것을 다루는 직업이 어울리고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일을 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풀이되더군요.

애와 함께 눈이 소복이 쌓인 큰길로 나왔습니다. 아직 날이 밝지도 않은 시간이어서 택시가 잘 오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부자는 말없이 서 있었습니다. 무언가 해줄 말이 있을 것 같은데, 아니 해주어야 하는데, 애비는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차가 오는 방향으로 돌아서 있는 아이의 뒷모습만 바라보며 애만 태우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도무지 말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아니, 떠올랐다고 해도 입이 떼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마침내 택시가 다가와 멈췄습니다. 뒷문으로 아이를 태우고 앞문으로 차에 오르려 할 때였습니다.

아빠, 혼자 갈게요.”

아이는 겨우 목젖이 갈라지는 소리로 말했습니다. 애비는 앞문을 닫고 뒷문을 다시 열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 안아보려고 뒷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막 잡는데 아이는 차 유리문을 내리며 기어드는 소리로 말했습니다.

건강하세요.”

애비는 가슴이 요동쳤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대꾸했습니다.

너도 건강해라.”

그 말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차마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보고 싶을 거라고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가슴에 품은 말 한마디쯤은 해줄 수도 있었는데 하지 못했습니다. 참 못난 애비였습니다. 평소,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해줬더라면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떠나보지는 않았을 겁니다. 사랑한다면 그렇게 보낼 수는 없으니까요.

애비는 아이가 타고 간 택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람마저 깨어나지 않은 어두운 새벽에 못난 애비는 아이와 함께 걸어온 길 위의 발자국을 한 발 두 발 되밟아 돌아오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