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숲‧수필의 숲 / 황소지
허리 수술 후 회복기에 접어들면서 운동을 해야 한다고 해서 매일 대신공원을 찾는다. 처음에는 집안에서 5백 보씩 1주일 걷고, 다음은 1천보씩 1주일 걷다가 가까운 구덕산 밑에 있는 공원을 찾게 된 것이다. 남편은 일찍 퇴근해서 걷기 운동을 하루도 쉬어서는 안 된다며 내 손을 끌며 앞장을 선다.
공원 입구에는 자갈이 듬성듬성 박힌 흙길이 정갈하게 닦여 있다. 길 옆 산비탈 바위 틈새에는 철쭉꽃이 피어 있고, 다른 한쪽은 사철나무가 알맞은 높이로 손질되어 있다. 공원에는 1백 년 이상 된 삼나무 수백 그루가 쭉쭉 뻗어 있고, 그 사이에 크고 작은 잡목들이 층을 이루며 푸른 잎새를 빼곡히 채우고 있다.
길을 따라 조금 거닐면 숲은 싱그러운 나무 향으로 가득하다. 길모퉁이를 돌면 꽃향기가 코끝을 스치기도 하고, 다른 곳에서는 낙엽이 곰삭는 거름 냄새 같은 것도 맡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은은한 향이어서 숲속에는 언제나 맑고 찬 공기로 상큼하기만 하다.
멀리서 우는 뻐꾸기 소리도 들리고 꿩이 울면서 날갯짓하는 소리도 들린다. 이름 모를 새가 삐삘삘 울음소리를 내며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 다닌다. 게다가 개울물 소리가 작은 폭포에서 나는 소리로 들리기도 해서 이곳이 별천지란 느낌을 갖게 한다.
이 길에는 여러 사람들이 오르내린다. 등산복을 차려입고 산을 오르는 사람, 약수를 길으러 가는 사람, 몸이 불편한지 지팡이를 짚고 가는 사람도 있고, 어린 아들 딸의 손을 잡은 젊은 내외며 연인들이 팔을 끼고 지나기도 하고, 운동선수들이 젊은 열기를 품으며 쌩쌩 바람을 일으키며 달리기도 한다.
길옆에는 자연석에 새긴 아무개의 시비(詩碑)가 있고, 구덕민속예술관 옆 정원에는 조각품도 몇 점 있다. 조각품 중에는 어린 천사들이 합창하고 있는 것과 아기를 품에 안은 어머니 상과 공작새 한쌍도 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우산을 받고 간다. 나뭇잎은 더욱 싱싱하고 잎새와 잎새에서는 빗방울 소리가 음악처럼 들린다. 해가 기울면 숲속은 더 어두워지고 가로등이 띄엄띄엄 켜진다. 등 주위에는 안개가 자욱하고 공원은 깊은 침묵에 빠진다. 나는 든든한 보호자인 남편의 손을 더욱 굳게 잡고 총총히 걷는다.
초여름의 대신공원은 바로 신록의 궁전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삶의 활력을 되찾게 되니 어머니 품속 같기도 하다.
뉴욕 맨해튼에는 센트럴 파크라는 넓은 공원이 있다. 어느 정신과 의사는 “뉴욕에 이 공원이 없었다면 이 공원 넓이의 정신병원을 지어야 했을 거다.”고 말했다는데, 그 말이 참 마음에 와 닿는다.
나는 매일 이 길을 걷는다. 6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이렇게 한가하게 걸어본 적이 있었던가? 그 동안 곁눈질할 새도 없이 뜀박질을 하기도 했다. 어떤 땐 서두르느라 길을 잘못 들어 더 먼 길을 돌아가기도 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힘겹게 걷기도 했다. 그 동안 참 많이도 걸어왔다. 병을 치른 후라 이런 여유를 얻게 된 것일까? 이 숲을 향해서 그렇게 열심히 걸어온 것이었을까
요즘 또 다른 기쁨이 내게 밀려온다. 허리 수술로 서툰 내 걸음걸이보다 더 못한 나의 글쓰기가 조그마한 책자로 결실을 얻게 되었다. 원로 대선배님이 격려의 편지를 주고 또 다른 선배님들과 후배님들이 따뜻한 사랑을 보내준다. 나는 마치 숲이 우거진 신록의 맑은 향기 속에 파묻힌 느낌이다.
수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수필인들의 공원에는 대신공원처럼 맑은 솔바람 같은 인정을 체감할 수 있어서 좋다. 나는 이 공원의 끝자리에 있는 작은 나무이지만 수필 가족의 품으로 감싸 안아주는 것에 감사한다.
글을 쓰는 것은 피를 말리는 괴로움이 따르기도 하고, 때로는 무한한 희열이 되기도 한다. 자기 탐구와 자기 성찰로 쓰이는 수필의 공원은 그리 넓지는 않지만, 그것은 넓은 세상을 위하여 존재해야 할 녹색의 영토가 아닐까.
병후에 내가 숲을 찾고 수필을 더 사랑하게 된 것은 새로운 생명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부단한 몸짓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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