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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37.2 / 정재순

37.2 / 정재순  

 

 

 

하얀 바탕에 새빨간 숫자 ‘37.2’가 시선을 붙든다. 사람 발길이 뜸한 거리에 우뚝 서 있는 간판이다. 그 옆에 '남자와 여자, 사람의 마음이 움직인다'로 시작된 설명 글이 빼곡하다. 영화 <베티 블루 37.2>에서 따온 이 숫자는 격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남녀의 체온이라고 한다.

주인공 베티처럼 모든 것을 걸고 하는 사랑,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러하지 않았을까. 그들에게 깃든 불안하고도 위험한 온도는 오래도록 이어졌을 것이다. 주인장이 카페 이름을 숫자 ‘37.2’로 정한 까닭을 짐작해본다. 여기에 오면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고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사랑은 어느 날 별안간에 안개처럼 스며든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언어로도 설명하기 어렵단 생각은 나이를 더할수록 짙어간다. 죽음을 눈앞에 둔 어느 유명한 아티스트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한 가지는 가슴 두근거리는 사랑이라고 했다. 인간의 본성이 타인을 사랑하려는 욕구가 숨어있는 것처럼누구나 따뜻한 관심을 받을 때 생기가 넘치게 된다.

연인의 어디가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묻는 질문에 대다수가 눈을 짚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서로 오고가는 눈길 속에 정이 깊어지는 모양이다. 흔히 여자를 꽃으로, 남자는 벌과 나비로 비유된다. 우주 만물이 그러하듯 음양의 이치란 서로 끌어당긴다. 꽃은 향기와 모양새로 나비를 유혹하고, 나비는 꿀과 향을 취하고저 이 꽃 저 꽃으로 날아다닌다.

청춘남녀의 이끌림은 봄꽃처럼 아름답다. 사랑할 상대를 선택하려는 솔로들의 자유연애는 마땅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허나 이미 갈 길이 정해진 경우는 다르지 않으랴. 혹자는 눈멀고 귀가 멀어야 열리는 사랑을 질병의 일종으로 여기기도 했단다. 알 수 없는 끌림, 통제할 수 없는 감정에 이끌리다보면 내가 아닌 내가 되어 판단력이 흐려지기 때문이리라.

수십 년 지기인 M은 전형적인 현모양처 형이다. 늦은 공부를 하면서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릴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인사를 나눌 때면 습관처럼 손을 잡는 남자와도 얼굴을 트고 지냈다. 몇 번의 만남이 이어지던 어느 날, 남자는 옆자리에 앉은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 동석한 사람들과 기나긴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일이라고 했다. 평소라면 냉큼 손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텐데 다소곳이 머물렀다. 동행한 사람들이 없었다면 남자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라갔을지도 모른다고 해서 내 눈이 뚱그래졌다. 잠시 흔들렸던 마음을 고백하는 크고 검은 눈동자에 여성미가 흘렀다. 그녀는 들릴 듯 말 듯 그깟 사랑이라며 아리송한 여운을 남겼다.

며칠 전 미장원에서 네일 샵 주인이 풀어놓던 수다가 귓전에 맴돈다. 주기적으로 네일 관리를 받으러 오는 여자는 옷차림이 유난스러웠다. 유부녀가 주저하는 기색 없이 외간남자와의 만남을 들먹이더란다. 듣고만 있기가 뭣해 추임새를 넣으면 소소한 부분도 자랑삼아 얘기했다. 샵 주인은 막장드라마 탓인지 결혼한 여자들의 일탈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며 혀를 내둘렀다.

사랑이 이성을 마비시키는 걸까. 도파민에 중독되어 자신 속에 갇혀버리면 수치심이 사라지는가보다. 사랑의 정의가 궁금했다. 그동안 불륜은 사랑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고 여겼다. 빗나간 욕망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서이다.

부부 연을 맺던 날, 여자도 검은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를 맹세했을 터이다. 가부장적인 상대의 무관심이 지나쳐 방향을 잃었으리라. 자기 말에 귀기울여주는 사람과 친해지면서 죄의식의 경계가 허물어졌을 것이다. 그럴지라도 지금의 설렘이 이제까지 자신의 삶과 맞바꿀 각오가 서지 않는 한 어찌 티를 내는가.

가벼운 사랑이 만연한 요즘에 흔치 않은 염문이 들려온다. 객관적으로 보면 불륜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를 인정하고 있는 날 느낀다. 영화감독과 배우로 인연이 시작된 두 사람은 그때껏 쌓아온 명예나 손가락질에 아랑곳 하지 않는다. 어떤 핑계도 내세우지 않고 오롯이 서로에게 충실하다.

연인은 다정히 손잡고 세상 앞에 나선다. 솔직하고 당당한 모습이 미쁘다. 그들 영화에 나오는 대사 한 토막이 기억에 남는다. "가짜사랑들만 하는 주제에……." 이러쿵저러쿵 저마다의 잣대로 폄하하는 세상을 향해 쏟아내는 말이 아닐까. 슥 보기에도 두 사람은 37.2°를 훌쩍 넘어섰을 것 같다.

사랑과 불륜, 아직도 나는 그 경계가 아득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