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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생의 수레바퀴 / 정태헌

생의 수레바퀴 / 정태헌

 

 

 

순간 통증이 솟구쳤습니다. 발등이 얼얼하고 발바닥은 경련이 일어났습니다. 무언가 맨살을 차고든 모양입니다. 발바닥을 들여다보니 핏기가 어린 유리조각이 살 속에 박혀 있습니다. 발바닥을 유심히 바라봅니다. 언제 이렇게 발바닥을 찬찬히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요.

발바닥은 신체 중 가장 낮은 곳에서 온 체중을 싣고 다니며 노역에 가까운 일을 하는 곳이지 않습니까. 발바닥이 없으면 어찌 땅을 디디고 상하 좌우로 이동할 수 있으며 신체를 곧추세울 수 있겠습니까. 발바닥 가운데 움푹 꺼진 데는 그늘지고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동안 왜 이다지도 발을 푸대접하고 무관심했을까요.

언젠가 큰스님이 산사에서 입적한 후, 법구가 다비장으로 운구 되어 가는 광경이 티브이에 방영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추슬러 멘 어깨위에 스님의 법구는 편히 누워 있었습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스님의 발은 천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지요. 스님은 발바닥으로 산천초목을 휘둘러보며 사부대중들과 이별하고, 사부대중들은 색색의 만장과 함께 법구의 발바닥을 바라보며 스님을 따랐습니다.

시절 인연이 다하여 이승을 떠나게 되면 다리는 비로소 머리와 나란히 같은 층위에서 대접을 받는 것일까요. 보이지 않는 얼굴 대신 발이 스님의 얼굴이 된 셈이지요. 죽고 나면 얼굴보다 발과 발바닥으로 그의 삶이 기억된다는 말이 맞는 모양입니다. 큰스님처럼 살다간 분들이 어찌 한두 사람이겠습니까. 성자들의 행적 또한 발을 통해 이룩한 가르침이 아니던가요.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기 직전, 슬피 우는 제자들에게 슬쩍 발을 내밀었다고 합니다. 평생 구도행으로 편평해진 평발이었지요. 이는 영취산 법회에서 연꽃을 들어 보인 것처럼, 발을 통해 제자들에게 생의 무량한 비의를 슬쩍 뚱겨주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공자도 고행 속에서도 제자들과 함께 드넓은 땅을 걸어 다니며 덕지를 펼치려 하였고, 예수 또한 발바닥의 수고를 아끼지 않고 곳곳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친 후 그 발에 못이 박히는 수난을 겪지 않았던가요. 성자들이 일군 삶의 궤적은 모두 발과 발바닥의 의로움과 수고로움이 이룩해 낸 거룩한 행적들입니다.

발은 보이지 않은 낮은 곳에서 생명을 일구는 식물의 뿌리와 같은 곳이지요. 하나 발은 뿌리내릴 수가 없기에 늘 움직이며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숙명이라면 생을 앞으로 밀고 나아가는 수레바퀴와 같은 일을 하는 게 발이지 않겠는지요. 이제부턴 발을 머리와 같은 층위에 놓아두려고 합니다. 인간의 발은 신()의 날개로 만들었다는 누군가의 말이 비로소 설득력 있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