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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돌멩이꽃 / 설성제

돌멩이꽃 / 설성제  

 

 

 

배보다 큰 배꼽을 샀다. 용기가 어디에 숨어 있다가 불쑥 고개를 쳐들었는지 모르겠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빚을 갚는 일이 마치 한 달에 한 번 쌀 한 가마니를 등에 짊어졌다가 내려놓는 기분이다. 내려놓자마자 또 가마니를 벌리고 정해진 양이 찰 때까지 곡식 퍼 담는 일을 반복한다. 매달 은행에 가마니를 부려놓듯 빚을 갚는 중 불현 듯 유쾌한 생각이 떠오른다. 살구놀이!

유난히 재미를 붙였던 놀이다. 지천으로 널린 돌멩이를 주워 모아 몇 명이 같이 하는 공깃돌놀이를 살구놀이라고 불렀다. 한 사람 당 스무 개 가량 돌멩이를 주워 와서 바닥에 깔아놓고 따먹기를 한다. 한 판이 끝날 때마다 살구를 땄든 못 땄든 반드시 내야 하는 세금 같은 것이 매겨져 있었는데 그것을 이라 했다. 마땅히 부를 이름을 짓지 못해서인지 모르지만 살구놀이를 통해서 빚을 알았다.

그날그날에 따라 많이 따기도 하고 빚을 지기도 했다. 돌멩이로 하는 놀이였지만 따거나 본전을 할 때와는 달리 빚을 진 채 끝이 나면 마음이 무거웠다. 한 판이 끝나고 다음 판이 되어도 빚은 여전히 지고 가야 했다. 파산신고는 없었다.

누가 이길는지는 끝까지 가봐야 알았다. 놀이 도중에 승부를 매길 수 없었다. 빚이 자꾸자꾸 줄어나서 깽판을 부려놓고 싶을 때도 있었다. 마음으로 지레 포기해서 하는 둥 마는 둥 하면 빚 갚기는 고사하고 더 늘어나기만 했다. 그럴 때는 빨리 해가 져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욕심 부리지 않고 두세 개씩 끌어모은 돌이 모이고 모여 어느새 무더기를 이루기도 했다. 앞에 진 빚을 다 갚고도 곳간이 넘쳐 났다. 마지막 한 톨까지 싹 다 긁어먹었을 때의 통쾌함!

헌데 어디서든 반전은 일어나기 마련인가. 승패가 뒤집혔을 때의 스릴감에 이제는 해가 지든 말든 상관없어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해는 지고 곳간은 비고 빚마저 산더미였는데 왠 횡재가 찾아온 것일까. 바닥에 돌멩이는 얼마 남지 않았지만 상대방이 곳감 빼먹듯 솔솔 꺼내놓은 것까지 내 것으로 돌아올 때의 기쁨과 괜한 자신감으로 이미 주변이 어두워지는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필 이맘 때 이집 저집에서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리다 못해 자식을 데리러 나온 사람도 있었지만 불어나는 재산 때문에 집으로 쉽게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재미에 빠져 버틸 만큼 버티다 하는 수 없이 돌멩이를 버려둔 채 후다닥 집으로 뛰어갔다. 어떤 날은 한쪽 구석에서 밀쳐놓지도 못한 체 내팽개쳐놓고 돌아갈 때도 있었다. 그런 날에는 부랑자 같은 머스마들이 지나가다 발로 냅다 차버렸는지 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도 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누군가 치워버리고 없으면 다시 제 분량만큼의 밑천을 모으느라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다녀야 했다.

여러 명 어울려 살구놀이를 했지만 각자 놀이를 즐기는 방법이 달았던 것 같다. 오늘 다르고 내일 또 다른 느낌으로 놀이를 했다. 나는 숫자놀음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돌맹이 몇 개를 모아 공중으로 살짝 던져 올릴 때 내 눈앞에 순간적으로 피었다 떨어지는 서늘함과 묵직함, 흙바닥에 깔린 돌을 끌어 모으는 순간의 말할 수 없는 충만감, 손톱 밑으로 파고든 흙의 까칠하고 따가운 촉감, 이런 것들에 빠져 빚이 늘어나는 줄도 줄어드는 줄도 잘 몰랐다. 그 놀이를 통해 누군가는 셈하는 것을, 누군가는 재산 모으는 재미를, 누군가는 모은 것을 다 잃은 아픔을, 또 나같이 어리버리한 이는 그냥 그 놀이 자체의 재미에 빠져있었다. 해가 질 때까지, 아주 어두워질 때까지도 살구놀이를 하다가 급하게 집으로 돌아갈 때가 많았다.

어릴 적 살구놀이를 하며 알게 된 빚이 생활 속까지 따라붙을 줄 몰랐다. 놀이건 실전이건 아직 생이 끝나지 않았다는 반증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나없이 빚을 지고 갚는 재미에 빠져있는 것 같다. 악착같이 해결하려고 해도 더 늘어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혜성같이 나타난 어떤 손을 잘 잡아 훨훨 나는 사람도 있다.

성향이 어디를 가랴. 매일 육중한 가마니 하나에 눌려 다리를 후들후들 떨며 은행 문 앞에 당도해 그것을 부려놓을 때마다 겨드랑이에 날개가 조금씩 자라고 있는 듯하다. 바닥에 깔린 돌멩이를 끌어모아 공중으로 휙 던져 올렸을 때 허공에서 순간적으로 피어나는 돌멩이꽃을 보는 듯도 하다. 해가 떠 있는 방향을 가늠하며 이런 재미도 솔솔 누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