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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잡곡밥 / 김응숙

잡곡밥 / 김응숙

 

 

 

아침밥을 짓는다. 흰 쌀에 듬성듬성 섞인 붉은 콩은 새벽 들판에 핀 나팔꽃마냥 생기에 가득차 있다. 검은 쌀을 넣으니 밋밋하던 흰 쌀이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보리와 현미는 잠 많은 돼지풀꽃처럼 눈을 비빈다. 찹쌀이 들어가 뽀얀 별꽃을 피우니 함지박 속은 들꽃들이 피어난 들판이 된다. 이 작은 들판을 바람 같은 맑은 물로 흔들어 씻어 솥에 안친다.

나이가 들수록 잡곡밥이 좋아진다. 어릴 때는 씹기 힘든 콩을 입안에서 굴리다 슬며시 밥상머리에 뱉어 놓곤 했다. 한창 자랄 때에는 부뚜막에 베보자기를 쓰고 있는 보리밥이 싫었다. 그 베보자기에는 때마다 끼니걱정을 해야 하는 청승스러움이 누렇게 배어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흰밥을 먹을라치면 어쩐지 허전하고 싱거운 기분이 든다. 햇빛과 비와 바람을 품었던 품새만큼이나 서로 다른 맛과 결이 어우러진 잡곡밥은 늘 구수하고 차지다. 씹을수록 세월에 곰삭은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진다.

콩은 모내기가 끝날 즈음에 귀한 작물들에게 안방을 내어주고 밭둑에 이리저리 심어져도 군말 없이 잘 큰다. 손바닥 같은 잎을 쓱쓱 내밀며 땅내를 맡고 자라는 산골 소년처럼 지치는 법이 없다. 보리에게는 이야기가 많다. 겨울밤의 푸르른 달빛이 밤새 속삭여준 이야기들은 흰 눈을 뚫고 파릇한 잎이 되어 넘실거렸다. 마침내 푸른 수염을 단 이삭이 솟아올랐을 때 제 살아온 시간들을 알알이 애기며 금빛으로 익어갔다.

보릿고개가 호랑이보다도 무섭던 시절부터 건강 곡물로 인정받게 된 오늘날까지 잡곡은 기꺼이 우리들 곁을 지키고 있다. 어느 시인은 이리도 예쁜 것을 잡초라 부르기가 미안하다거 말했다. 나는 이리도 귀한 것을 잡곡이라 부르기가 참으로 미안하다.

밥이 끓으면서 구수한 냄새가 난다. 유독 잡곡밥을 좋아하시던 시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지 일 년이 다 되어간다. 어머니께서는 평생 보리쌀에 쌀을 섞어 새벽밥을 지으며 울퉁불퉁한 오남매를 가슴에 끌어안고 사셨다. 일찍 친정어머니를 윈 이 셋째 며느리마저도 품어주시곤 했다. 어쩌면 전혀 다른 토양에서 자란, 참으로 익히기 어려운 또 다른 잡곡 같았을 텐데도 말이다. 함께 살았던 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어머니와 나는 잡곡밥을 해먹어가며 울고 웃었다.

어머니에게서 치매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 자식들은 언제 쯤 병원으로 모실지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어차피 병원으로 가실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집에서 어머니를 보살필 수 없는 이유는 많았지만, 그 모든 이유는 밥벌이를 해야 한다는 한 가지 사정으로 귀결되었다. 모두가 먹고 살기도 바쁜 이 시대에 유산도 없는 어머니는 이제 분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결정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잡곡밥에서 콩 골라내듯이 어머니를 병원에 모셔놓고 돌아온 날, 많이도 울었다. 홍수가 밀고 온 퇴적물처럼 후회가 가슴에 쌓였다.

노인 병원으로 옮겨진 어머니는 급격하게 사위어갔다. 자식들을 바라볼 때마다 생기가 돌던 눈동자는 말라버린 우물처럼 공허해졌다. 세상이라는 단단한 암벽의 틈 사이를 나무뿌리처럼 파고들었던 열 개의 손가락은 하얀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 석고처럼 굳어갔다. 나는 이따금씩 찾아가 그래도 미련인양 눈가에 붙어 있는 눈곱을 물수건으로 닦아내고 하나씩 손마디를 젖혀 주무르곤 했다. 그리고 무심한척 하며 세월의 소금기가 허옇게 앉은 머리를 빗질했다.

어느 날 병원에 가보니 밥 대신 멀건 미음 봉지가 머리맡에 매달려 있었다. 욕창이 심해지고 몇 번의 패혈증이 지나간 후였다. 음식으로 인한 독을 해독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제 어머니는 살아서는 더 이상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드실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성격이 급하고 야망이 컸던 큰아들은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뜨거운 불판에서 콩 튀듯이 튀었다. 그 단단하고 격정적인 콩은 어머니에게 평생 동안의 소화불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보다도 잘 살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했던 둘째 아들은 항상 현미처럼 껄끄럽고 겉돌았다. 급하고 궁할 때마다 셋째 아들은 기꺼이 보릿자루가 되어 주었으나 자식의 자루에서 퍼낸 보리쌀로 지은 밥이 어찌 어머니의 목으로 쉬이 넘어갔겠는가. 찹쌀처럼 차지고 싹싹한 막내아들은 큰 자랑이었지만 늘 멀리 있었다. 잡곡밥 위에 얹혀있던 대추 같았던 고명딸을 푹 떠서 시집을 보낸 뒤로 어머니의 가슴에서 그 자리는 붉은 멍이 되었다.

자식이란 본래 그런 것인지 어느 자식 하나 어머니의 잡곡밥에서 녹록한 자식은 없었던 듯하다. 끊임없이 끌어안으며 끓이고 뜸 들여 자식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먹이고자 했던 어머니의 가슴은 서서히 식어갔다. 모두들 그 가슴에서 지은 밥을 먹고 자라났으나 누구도 어머니의 가슴을 덥힐 따뜻한 밥 한 그릇을 지어 드리지 못하였다. 진정 편한 마음으로 드실 수 있는 밥 한 그릇을.

어머니의 가슴 솥이 차갑게 식었을 때 장례는 치러졌다. 절차에 대한 의논은 있었으나 자식들로부터 골라내어진 어머니의 삶에 대한 회고는 유예되었다. 싸락눈이 내리는 차가운 땅에 유해를 묻고 돌아온 저녁, 앞으로 우애 있게 지내자는 다짐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콩은 콩으로, 현미는 현미로, 보리는 보리로 제각각 되돌아갔다. 뜨거운 솥이 사라졌으니 언제 다시 구수한 어머니의 잡곡밥을 먹어볼 수 있을까.

밥이 다 되었다는 신호음이 들린다. 작은 들판은 솥 안에서 잘 익어있다. 콩도 현미도 보리도 뽀얀 김 속에서 상기된 표정들이다. 이제부터 자신들의 지나온 시간들을 세상에 풀어놓으려는 듯이 보인다. 잡곡밥을 꼭꼭 씹으면서 그 이야기를 들어볼까 한다. 행여 뜨거운 가슴 솥의 열기가 전해져오면 아마도 나는 눈물이 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