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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방생 / 김응숙

방생 / 김응숙  

 

 

 

아들의 자전거가 도착했다. 바퀴도 두툼하고 뼈대도 굵은 것이 제법 실해 보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있고 핸들과 페달을 연결하는 파이프에는 날카로운 것에 찢긴 자국이 선연했다. 아들은 인편에 자전거만 실어 보내고 막상 저는 며칠 더 머물다가 돌아오겠다고 했다.

아파트 단지 한 쪽에 설치되어 있는 거치대에 자전거를 묶었다. 자전거의 몸체에서는 거친 세상에서 묻어왔을 쇳내와 고된 일상에서 배어들었을 땀내가 났다. 나는 핸들에 가만히 손을 얹어 보았다.

아들이 처음 두 발 자전거를 배우던 날은 햇살이 무논의 물처럼 운동장 가득 찰랑거리던 날이었다. 세살 터울 누나의 자전거 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아들은 저도 자전거를 타보겠다며 호기 있게 나섰다. 그동안 타던 세발자전거는 개울가에 두고 온 종이배처럼 놀이터에서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진 뒤였다. 남편은 페달에 발이 닿을 수 있도록 안장을 낮추고 아들을 들어 올려 자전거에 태웠다.

몇 날 며칠이 걸렸을 것이다. 남편이 뒤를 잡아주기는 했어도 여러 번 넘어져 무릎이나 팔꿈치가 까지기도 했다. 그래도 어린 것이 포기하지 않고 줄기차게 올라타더니, 어느 날 기특하게도 혼자서 자전거를 탔다. 비록 비뚤비뚤 비틀거리기는 했어도 말이다.

커갈수록 아들의 자전거에는 속력이 붙었다. 아들이 바람을 가르며 단지 앞 도로를 달려 나가는 것을 나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지켜보았다. 차량 방지턱을 간단없이 넘는 것을 바라보기도 했다. 한결 어른스러워 보였다. 울퉁불퉁한 이 세상에서 균형을 잡으며 앞으로 나아갈 능력이 아들에게 생긴 것도 같았다. 햇살을 받으며 달려가는 아들의 자전거가 세상이라는 바다를 향해 힘차게 꼬리치며 나아가는 한 마리 물고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몇 번 대기업의 문을 두드리다가 한 중소기업의 인턴사원으로 취직을 했다. 굴지의 조선회사에 특채의 기회를 준다는 조건에서였다. 아들은 바다를 면한 광활한 부지 내에 있는 회사로 출퇴근을 하기 위해 자전거를 샀다. 아들의 자전거는 이번에는 정말로 선조 중인 배가 떠있는, 바다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곤 했다. 마침내 세상이라는 바다로 방생이 된 것이다.

아들이 첫 출근을 하던 날, 나는 몇 해 전 남해 보리암에서 불고기를 방생하던 일을 떠올렸다. 필히 어느 양식장에서 눈을 떴을 치어들이 양동이에 가득했다. 뜰채로 건진 물고기 몇 마리를 넣은 비닐봉지를 들고 나는 바닷가로 내려섰다.

들이치는 파도가 온순하게 잦아드는 갯바위 아래쪽을 골라 봉지를 풀었다. 투명한 봉지 속에 말간 눈을 비추던 물고기들이 일순 바닷물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그러나 바다는 어린 물고기들을 쉬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밀려가는 파도를 타고 사라졌던 물고기들이 다시 파도가 밀려오자 갯바위 아래 웅덩이로 되밀려와 맴을 돌았다. 그러기를 몇 번인가 하더니 마침내 물고기들이 사라졌다. 그 차갑고 막막한 바다로 어린 물고기들이 나아간 것이다.

집과 학교의 울타리를 벗어나 처음 접하는 세상이 만만할 리는 없지 싶어 마음이 쓰였다. 동료들과 어울려 숙소생활을 하는 터라 곁에 두고 보살필 수도 없었다. 그저 퇴근시간을 가늠하며 가끔씩 전화를 했다. 그럴 때마다 잘 지내고 있다는 밝은 목소리를 들었다. 아들은 직장생활의 어려움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나는 오토바이의 물결 속에서 당당하게 자전거를 저어가는 아들을 상상했다. 실재로 TV에서도 그런 장면들이 나오곤 했다. 조선은 우리나라 중공업을 대표하는 산업이 아닌가. 도크에서 건조중인 커다란 배를 보면 뿌듯한 자부심도 느껴졌다.

그러나 조류가 변하듯 상황이 바뀌었다. 언젠가부터 조선 불황이라는 말이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경기침체로 수주량이 급감했다고 했다. 관련업체의 줄도산을 피할 수 없어 보인다는 내용도 보도되었다. 비어있는 도크 뒤로 차갑고 거대한 바다가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그즈음 집으로 돌아오겠다는 아들의 전화를 받았다. 나는 애써 담담했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살다보면 이런 일들은 늘 있기 마련이라는 듯이. 사실 바다에서 끊임없이 파도가 일듯 우리네 세상에서도 이런저런 부침은 끝이 없는 것이 아닌가. 아니 파도가 바다를 살아있게 하듯이 어쩌면 이런 일렁임 또한 삶의 원동력이 될지도 모를 일이라고 자신을 타일렀다.

처음 경험한 바다가 아니었던가. 세상이라는 바다를 헤엄치다 비늘 몇 개 떨어지고 꼬리지느러미에 상처를 좀 입었기로서니 무엇이 대수이랴. 자신이 방생되었던 포구로 돌아와 잠시 쉬었다가 다시 바다로 나아가면 될 일이다. 그때는 지금의 상처가 도리어 갑옷이 되어 주지 않겠는가. 상처를 이기고 돋은 비늘이 더 단단한 법이다. 나는 기름걸레로 자전거의 흠집을 꼼꼼히 닦았다.

비었던 아들의 방을 청소하고 소고기 국을 끓인다. 흰 쌀밥도 짓는다. 고봉으로 푼 자신의 밥그릇 위에 한 숟갈을 더 얹는 나를 보며 아들은 겸연쩍은 표정이다. 그러더니 금방 뚝딱 먹어치우고는 자전거를 타고 나간다.

아들의 자전거가 차량 방지턱을 훌쩍 넘어가는 것이 보인다. 등에 닿는 햇살이 비늘처럼 반짝인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도 들리는 것만 같다. 저 앞에서 푸른 세상이 일렁인다. 다시 한 번 아들의 자전거가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