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의 비만 / 임영도
사무실 자리에 앉으면 책나라의 성주가 된다. 책상을 중심으로 전후좌우에 3~5단으로 짜여진 책장들이 성곽처럼 든든하게 둘러 쌓여있다. 책장 속에는 500여권의 각종 책들이 성곽을 지키는 병사인 듯 각자의 자리에서 부동자세로 빼곡히 서있다. 여백의 틈이 벌어진 곳에는 어깨를 옆으로 기대어 기울어진 자세를 보이기도 한다. 키순, 몸집 순으로 또는 비슷한 이름끼리 가지런히 모여서 지나온 과거의 사연들을 간직한 채 성주의 눈에 띄기를 기다리는 듯하다.
가끔 휴일 날 텅 빈 사무실 책상에 앉아 진한 커피 향을 맡으며 책나라를 산책할 때가 있다. 눈앞에 펼쳐진 책장 중에서 25년 전 처음 사무실을 시작할 때 만난 후 지금껏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두 개가 있다. 고급스러운 자재로 만들어진 명품은 아니지만 소박하고 단아한 4단짜리 목재 책장이다. 색 바랜 그 둘을 바라보면 과거와 현재의 삶을 만날 수 있어 감회가 새롭다. 오래된 빈티지(Vintage)풍이지만 최신의 책들을 주로 품고 있는 자랑스러운 책장이다.
책장은 정보의 보고이다. 요즘에는 다량의 정보를 쉽고 빠르게 얻을 수 있는 인터넷에 귀한 자리를 내어주었지만 ‘정확한 정보’는 책장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는지. 책장은 유통기한동안 먹을거리를 저장하는 냉장고나 정해진 공간에 철따라 수납하는 옷장과는 보관룰이 다르다 할 수 있다. 저장품이 생필품과 근본적으로 다른 지식자산이라 유통기한도 유행도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책장도 가끔은 순환을 한다. 주인이 일터를 옮길 때면 불만 없이 따라 나선다. 그때마다 정보나 지식이 새로운 자리에서 새롭게 정리된다. 책장의 정리는 과거와 대화의 시간이다. 빈자리를 채우면서 지난 삶을 회상하며 추억여행을 떠나는 짬이기도 하다. 책장은 책을 수납하는 단순한 창고가 아니다. 지혜의 원천이며 외장형 두뇌라 할 수 있겠다. 기억용량부족을 보완해주는 지식의 하드디스크가 아닐까싶다. 책장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의 궤적을 바라볼 수도 있다. 주인이 어떤 지성의 소유자인지를 비춰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거울을 보며 몸의 상태를 확인하듯 책장을 보며 지적 상태를 유추하기도 한다.
책은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라 할 수 있다. 창에 비치는 모습은 시각의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책을 읽는 눈은 깊은 계곡의 물처럼 맑고 깨끗해야한다. 책장의 진정한 주인은 책이 아닐까한다. 성주처럼 행세하는 나는 책의 관리인 일뿐이란 생각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구입했던 책의 선택은 삶의 과정과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사회적 지위나 나이, 사고의 틀이 삶의 방식을 변화시켜왔고 책의 위치와 손길의 거리를 다르게 해왔다.
책은 삶의 밑거름이었다. 책장 귀퉁이 한곳에서 오래된 책 한권을 뽑아본다. 명심보감明心寶鑑이다. 고등학교 입학 때 아버지께서 사주신 책이니 족히 50년의 역사를 지닌 셈이다. 누렇게 변색되어 내 책장의 책 중에서 가장 오래된 고서로 자리 잡고 있다. ‘교만은 손해를 초래하고 겸손은 이익을 받는다.’ 라는 글귀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30~40대에는 건축설계를 하면서 일을 위해 필요로 했던 300여권의 책들을 사 모았다. 지금까지 네 개의 책장 대부분을 차지하고 늠름하게 꽂혀있다. 나의 인생이고 삶의 역사라 할 수 있다. 남들이 살 때 같이 사지 않으면 지식이 뒤처진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열심히 사둔 것들이다. 외국원서라고 영어제목을 달고 오만하게 꽂혀있지만 대부분 해적판이다. 지적재산권이 보호받지 못하던 시절 ‘1㎝ 두께에 1,000원’ 식으로 값이 매겨진 비운의 책들이다.
50대에는 관리(management)란 제목의 책들이 마음을 끌었다. 건강, 사람, 일, 재물, 인생관리 등으로 삶의 숨고르기 시간이었던 것 같다. 50여권의 책들이 가까운 왼쪽 책장에 도도하게 서있지만 삶의 관리는 썩 잘해오지 못했던 게 아닌가 싶다. 60대의 시작에는 책도 숨소리가 조용해진 듯하다. 철학, 취미, 여행, 문학관련 책들이 책상에서 멀지않은 오른쪽 책장에서 고고하게 얼굴을 내밀고 있다. 최근에는 온통 수필집 일색이다. 등바로 뒤 오랜 책장에서 깨끗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가장 친근한 자리이다. 왼쪽 모서리에는 내 이름으로 만들어진 10권 남짓한 기술서적들이 찬란하게 빛을 내며 위안을 준다. 책의 거리도 세대에 따라 달라지는 듯하다.
책장 속 책들을 통해 지난 일을 추억하고 내일을 상상해본다. 깔끔하게 꽂힌 책의 얼굴들을 바라보기만 해도 새로운 발상이 생기곤 했던 책들에 무한한 고마움을 느낀다. 책은 오랜 시간 축적된 3차원의 인공지능(AI)이란 생각이 든다. 책 버리는 것을 소중한 보석을 버리는 듯 아깝게 생각했던 욕심이 책장을 비만하게 만들어왔다. 불필요해진 것을 과감하게 버리는 것이 ‘무소유’라고 하지 않는가. 새로운 책이 들어갈 여백을 만들어주도록 적절하게 정리와 순환의 다이어트가 필요할 듯하다. 비움이 공간에 활력을 불어넣고 새로운 에너지가 쌓여 또 다른 미래를 설계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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