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하는 장구소리 / 이미애
얼마 전에 친정집이 이사를 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아직도 이사 때마다 번거롭게 들고 다니는 애물단지를 내놓으며 “네가 이거 가져가련?” 하셨다. 인사치레로 대답을 하고 보니 언제 봐도 엄청난 크기의 장구였다. 그 장구는 단 한번도 그 실체를 드러내지 못한 채 천가방에 갇혀 아버지 곁에 머물고 있었다.
벌써 이십 년도 더 된 이야기이다. 형제끼리 십시일반 용돈을 모아 지리도 잘 알지 못하는 국제시장을 반나절도 더 돌아다니며 기뻐하실 모습만을 머리에 그리며 발품을 팔아 아버지의 생신선물로 마련한 것이었다. 굴뚝같은 어둠 속에서 겨우 찾아낸 내 덩치만한 장구를 낑낑거리며 들고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바로 달려가 드렸더니 아버지는 생전 처음 보는 무서운 얼굴이 되셨다. 그때 아버지는 “니가 쓸데없는 짓을 했구마”라고만 하셨다. 그 후 그 장구는 주인을 단 한번도 만나지 못한 채 다락 속에서 세상을 버린 채 살아야만 했다.
〈노세 노세 젊어 노세/늙고 지며는 못 노느니/이팔청춘 소년들아/백발보고 웃지 마라/엊그제는 나도 청춘이다〉
이 노래는 강강수월래란 민요에도, 논을 매는 잡가타령의 노래에도, 속요 등 다양한 가락으로도 섞여 불려지고 있지만 내 아버지에게는 소위 말하는 애창곡인 셈이다. 내가 예닐곱 살 때부터 들어왔던 가락이었으니까. 호리호리한 몸매에 미남형의 아버지는 장구수로 좌중을 매료하는 비상한 재주가 있었다. 버선코로 사푼사푼 마치 구름 위를 걷듯이 날렵한 춤사위는 언제 보아도 신기하기만 했다. 또한 가슴께에 포옥 안긴 설장구를 정신없이 두들기며 사방팔방 맴을 도는 품새는 하늘 천지에 어쩌면 저런 맵시가 남정네에게서 우러나올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답고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어쩌면 한 마리 고고한 학처럼 품어져 나오는 옛 여인네의 고결한 몸짓도, 이리저리 꺾어지는 어깨자락도 눈에 들어왔지만 톡톡 걷어 올리며 발끝을 놀리는 솜씨가 최고로 어린 내가 보기에도 예사로 보이지만은 않았다. 누구나 절로 신명나게 만드는 아버지는 전문춤꾼 못지않은 멋과 맛을 아는 흡인력을 가지신 분이었다. 거기다 마치 고수처럼 추임새라도 넣을라치면 아버지의 신명을 늘 낯뜨거워하던 나도 저절로 어깨가 들썩거려졌다.
아버지의 “얼쑤, 좋다, 으이, 얼씨구 절씨구”같은 추임새는 힘과 절도, 그리고 근원을 알 수 없는 한(恨)이 녹아있어 사람들을 지독하게 흥겹게도 또한 한없이 슬프게도 만들며 장구장단에 몸을 맡기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무한한 끼로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풍류남아였다. 가락과 춤, 그리고 술이 있는 자리엔 항상 아버지가 있었다. 그런 아버지가 자라면서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고 그 얼마나 부끄러워했던가. 늘 사람의 무리에서 흥을 돋우고 궂은일은 도맡아 하면서도 사람대접이라곤 받지 못하는 아버지가 속된 표현처럼 딴따라나 날라리란 생각을 나 자신조차 떨쳐버릴 수 없어서 아마 더욱 서먹하기만 했던 부녀지간이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쉰 살에 낳은 늦둥이였다. 서른을 넘긴 큰아버지가 가장노릇에 만석꾼의 살림을 차지하고 아들까지 낳는다고 애첩까지 데리고 와 한집에서 살림을 차려 졸지에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아버지는 눈칫밥으로 자라야만 했다. 학교도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인 아버지는 마을에 사당패나 곡마단이라도 올 양이면 그곳에서 자연스레 풍악에 심취하곤 했다. 아버지는 그리 활달하진 않았지만 이상하게 이 사당패들만 왔다 가면 며칠씩 종적을 감추었다고 했다. 기어코 그들을 따라 자신이 하고 싶은 잡기(雜技)를 하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은 할아버지만을 두고 떠나질 못하고 그냥 뜻을 접고 되돌아오곤 했다. 춤과 노래를 망나니나 하던 줄로 알고 있던 큰아버지는 아버지가 집안을 말아먹는다고 늘 노발대발이셨다고 했다.
손재주도 뛰어나서 장구 만드는 솜씨에도 일가견이 있던 아버지는 오동나무를 베어와 말가죽과 쇠가죽을 푸줏간에서 얻어와 양쪽 마구리에 팽팽하게 씌운 철태에 대고 당겨서는 그런 대로 쓸만한 장구를 만들어 혼자서 손과 궁채로 번갈아치며 깨어진 꿈과 끼를 소리로 떨치곤 하셨으리라. 큰아버지는 그 뚱땅거리는 꼴조차 보기 싫다고 그렇게 힘들여 만들어놓은 장구를 갈기갈기 찢기도 여러 번이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이 망가지는 것을 차츰 무기력하게 받아들였다. 가장의 무게에 항거하는 그 어떤 대꾸도 그땐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당하기만 하고 살다 분가해 부산으로 오면서 고향사람들이 하나둘 한동네에 모이고 아버지에게 남아있던 풍류기질을 불러내 시름을 잊는 법을 함께 즐기곤 했던 것이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내일이 없던 시절이었지만 봄놀이를 가고 단풍놀이를 가서 잠시나마 세상사와 배고픔을 잊으려 했으리라. 그런 숨 쉴 틈 없는 가난의 톱니 속에서도 항상 풍류와 웃음, 끼를 간직한 유일한 배출구와 같은 인물이 아버지였다. 그러다 자식들이 제 앞가림을 할 때가 되자 스스로 그 끼를 버리고 애써 자신의 녹록하지만은 않았던 역사를 덮으려고만 했다. 한때 비상할 꿈이었던 아버지의 부러진 날개를 그때서야 이해하고 선물로 마련해드렸지만 굳은 표정으로 마다하셨던 것이다.
이제는 내가 그때 아버지의 나이가 되었다. 아버진 여전히 그 애물단지를 꺼내보지도 않으면서 내버리지도 못하게 하신다. 늘 침묵으로 일관된 태도에 대답은 도리어 물음표가 되어 내게 돌아온다.
아버지는 과연 그 잃어버린 꿈의 정령들을 언젠가는 불러들일 수 있을까. 아직도 못다 이룬 장구와의 연(緣)과 춤에 대한 끼를 가슴에서 훑어내지 못한 것은 아닐까. 아주 가끔씩 깊이를 알 수 없는 무념(無念)의 자세로 끝 간 데 없이 세상을 건너다보는 아버지의 처연한 눈빛을 마주할 때가 있다. 표정도 없고 기쁨도 없고 의욕도 떠나고 남은 거라고는 삶의 수레바퀴에 깔린 굵은 연륜의 추락하는 일상밖에는 곁에 없다. 창공을 향해 베일 듯이 볏이 선 소맷부리를 휘날리며 어깨춤을 덩실거리던 우리 아버지의 풍류는 어디로 다 흘러가 버린 것일까. 이제는 영영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요즘엔 어르신들이 곧잘 흘리는 ‘마음은 청춘인데 몸이 말을 안 듣네’라는 푸념이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일흔을 바라보는 아버지가 그 묻어버린 꿈과 세월을 안타까워하는 넋두리로 들려오기 때문이다. 시절을 잘못 만나 멍든 노랫가락에 일장춘몽(一場春夢)같은 내 아버지의 신세가 눈물로 빚어지는 건 아닐까. 아버지는 어쩌면 그 묵혀둔 장구소리를 남모르게 두들기며 예인(藝人)의 세월과 소리를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휘영청 달 밝은 밤에는 어디선가 덩덩덩 아버지가 못다 두드린 장구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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