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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여름나기 / 설성제

여름나기 / 설성제

 

 

 

더워서 죽겠다.”가 입에 달린다. 예전에 미처 느끼지 못했던 무더위까지 맛 좀 보라는 듯 여름은 봄이 가기도 전에 와서 가을이 오고 난 후에도 쉬이 사그라들 줄 모른다. 온실가스에 소 방귀에서 터져 나오는 메탄가스까지 합세하여 지구온난화가 더해지고 있다니 여름은 갈수록 태산이다. 에어컨 덮개는 벗겨놓았지만 나 하나라도 지구사랑 운운하며 선풍기를 들고 앉는다.

농수산물 시장에 들렀더니 포터에 수박이 셀 수 없을 만큼 실려 있다. 둥근 것에도 각이 있을까, 어쩌면 저토록 아귀를 착착 맞추어 쟁였을까 싶다. 장부(丈夫) 두 명이 짐칸 가장자리에 붙어서서 한 덩이씩 덜어낸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 수박을 받아 저울에 단 후 나름 배열규칙에 따라 바닥에 행렬을 세운다. 그리고 상품이라고 씌어진 금색리본을 수박의 이마빼기마다 붙인다.

많고 많은 과일 중 수박이란 놈의 자부심은 대단해 보인다. 인부를 부리는 저 도도한 횡포에 아무리 힘센 사람이라도 두 덩이씩은 들지 못한다. 포터에 실린 놈들이 수백 개는 돼 보이는데 하나씩 하나씩 품에 안아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모습을 본다. 수박 패대기치기를 했던 어린 날 여름이 떠오른다.

한낮 땡볕을 마주하며 탁이네 수박밭을 지나게 되었다. 널따란 이파리들 사이로 시퍼렇고 둥글둥글한 궁둥이 같은 것들이 숨어있고, 덩굴에 매달린 채 고랑으로 굴러 내려온 것들도 있었다. 우리는 눈을 맞추고서는 밭으로 숨어들었다. 미야가 수박을 퉁퉁 두들겨보기 시작했다. 어떤 소리가 잘 익었을 때 나는 소리인지 몰라 그 중 가장 큰 것을 골라 땄다. 우리는 수박을 안고 원두막까지 점령했다. 원두막이 왜 그리 높은지, 오르는 사다리에 줄을 서서 수박을 전달해 올렸다. 칼이 보이지 않았다 현이가 일어서더니 수박을 들었다. 그리고는 마치 폭탄 투하하듯 바닥을 향해 던졌다. 많이 해본 듯한 솜씨였다. 수박은 반쪽이 나고 몇 조각의 파편이 튀더니 벌건 속살과 콕콕 박힌 까만 씨를 드러냈다. 우리는 흡혈귀가 되어 얼굴을 쳐 박은 채 달고 뜨뜻미지근한 수박을 먹기 시작했다. 단번에 수박물이 얼굴에 베어들었다. 반도 먹지 않은 채 버려두고 또 다시 밭으로 나갔다.

닥치는 대로 수박을 두드렸다. 잘 익었는지 덜 익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걸려들까 기대에 찼다. 큰놈 작은놈 구별하지 못했지만 서로 최고를 알아보기 위해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한 놈이 걸려들면 첫 만남의 인사로 몇 번 통통 두드려 주는 것이 당연한 법이다. 사과를 깎기 전에 칼등으로 사과의 정수리를 때리며 인사를 하는 것처럼. 그렇다고 서리하는 수박을 살살 간질러주듯 해서도 안 되었다. 인정사정없이 퉁퉁 치며 인사를 건네면 되었다.

또 하나 걸려들었다. 얼른 땡볕을 피해 다시 원두막으로 올라갔다. 이번에는 내가 깨기로 했다. 꼭지를 잡은 채 떨어뜨려서 깨뜨리고 싶었으나 수박의 힘은 땡볕처럼 강했다. 결국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머리 위로 수박을 들어 올렸다가 던졌다. 박살이 났다. 원두막 바닥이 벌게졌다. 우리는 또 수박의 파편 한 조각씩을 얼른 주워 먹다가 모두 땅 속으로 파묻어버렸다.

화야와 근이와 경아가 돌아가며 수박을 깨뜨렸지만 하나도 제대로 먹지 않은 채 모두 땅 속에 묻었다. 밭주인이 알면 홧병이 날지도 모른다는 것을 우리도 알았으니까. 우리는 이마와 볼, 그리고 입가에 수박씨를 붙인 채 원두막이 떠나가도록 웃었다. 그때 탁이 아버지가 나타났다. 저만치서 지게 작대기를 휘두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뛰어라!”

순간, 우리는 한꺼번에 소리를 지르며 원두막 밑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아무 신발이나 꿰차고 내달렸다.

며칠이 못가 다시 탁이네 원두막 생각이 났다. 딱 두 덩이만 손을 대기로 약속했다. 탁이 아버지가 경운기가 뒤집히도록 수박을 싣고 읍내로 멀어져갈 때나 원두막에 막걸리 병을 줄 세워놓고 코를 곯고 있을 때는 최고의 기회였다. 어김없이 수박 머리통을 두드려보다 걸려드는 대로 깨뜨렸다. 어떤 것들은 마그마처럼 붉게 용암이 흘러내리듯 박살나는 것도 잊었다. 먹는 둥 마는 둥. 살쾡이처럼 땅을 후벼 파 묻어버리고 얼굴을 쓱쓱 닦으며 원두막을 나서곤 했다. 그런 중 비 오는 날도 만나고 지나가던 태풍도 만났다. 수박이 물에 잠겼을 때는 차마 서리할 수 없었다. 그것은 탁이 아버지의 눈물 같기도 하고 땀방울 같기도 해서 함부로 밭에 들어설 수가 없었다.

여름이 끝나갈 즈음, 밭주인들이 밭을 놓았다. 아무나 와서 마음대로 따가도 좋다는 것이었다. 몰래 먹는 떡이 단 법, 놓아버린 밭에 남아있던 수박은 볼품없이 보여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땡땡하고 푸른빛이 선명하던 여름이 금방 시들시들해져서 널브러져 있었다.

갈수록 여름이 지루하게 달라붙는다. 숨이 막힐 것 같다. 불덩이가 되어가는 이 지구가 무섭다. 탁이 아버지가 눈을 부릅뜨고 달려올 때 휘둘렀던 지게 작대기로 저 태양의 이마빼기를 내리치며 인사를 건넨 후 태양서리를 해버릴까. 그러면 그해처럼 여름은 금방 시들시들해 질까. 환경오염이니 지구온난화니 해서 에어컨조차 마음껏 틀지 못하고 선풍기 날개바람 앞에 앉아 수박 한 통으로 무시무시한 여름을 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