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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해당화 / 오창익

해당화 / 오창익

 

 

 

해당화는 바닷가 모래밭에 피는 꽃이다. 5월이 되어 대지가 신록으로 물들기 시작하면, 넓고 기름진 산야를 마다하고 표연히 바닷가로 달려가 천 년 한을 머금은 듯 홀로 피는 꽃이다. 사랑하는 정든 임을 두메산골에 남겨 두고 궁녀로 끌려간 아리따운 처녀의 이름을 따서 찔레라 부르기도 하고, 그 처녀를 애타게 기다리다가 마침내는 병들어 죽은 머슴애의 눈물자국에 핀 슬픈 넋이라 하여 단장화(斷腸花)라고도 이름하는 꽃이다. 그러기에 시인 묵객이 그려놓은 고사(故事)도 많고, 지어낸 이름, 전해오는 애달픈 설화도 많은 꽃이다.

내가 해당화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소년기를 막 벗어나려는 열여섯 살 때의 일로, 지워버릴 수 없는 아픈 추억이 그 꽃에 있다.

1951, 1.4후퇴의 피난길에서였다. 터진 봇물처럼 남쪽으로 밀려가던 피난민의 대열이 임진강 아군의 방어선에서 더는 못 가게 제지를 당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연안(延安)으로 우회하여 청룡면(靑龍面) 앞 바다에 있는 Y(지금은 비무장시대에 속해 있는 무인고도로써 썰물 때가 되면 걸어서 건널 수 있음)으로 밀려가게 되었다. 남하할 뱃길마저 끊겨 손바닥만 한 Y섬에는 만여 명의 피난민으로 아비규환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때아닌 총소리가 깊이 잠든 Y섬을 뒤흔들었다. 뭍에서 공산군 패잔병의 한 떼가 Y섬을 습격한 것이다. 그때, 공산군과 맞 싸운 것은 물론 피난민들로 구성된 자치대원들 뿐이었다. 먼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피아의 총성은 멎고 공산군은 뭍으로 다시 건너갔다. 그러나 이를 어찌 하랴. 손을 붙들고 평양을 출발하여 장장 5백리 길을 같이 걸어온 고향 선배인 R형이 전사를 했던 것이다. 얼어붙은 바닷가, 임자 없는 주검들이 어지럽게 흩어진 모래밭에서 나는 R형을 붙들고 정신없이 울었다. 끝내 형은 군번도 없는 전몰용사가 되어 고향이 바라다 보이는 북쪽 언덕 및 바위틈에 묻히게 되었다.

그 겨울이 지나 봄이 되어도 중부전선의 격전이 그치지 않아 남하의 뱃길은 열리지 않았다. 그해 봄과 여름을 Y섬에서 보내는 동안에 나는 처음으로 해당화를 알게 되었다. R형의 무덤가에는 언제부터인가 1미터가 될까 말까 한 작달만한 키의 가시꽃나무 한 떨기가 돋아나 비석처럼 지키고 있었다. 그게 알고 보니 해당화였다. 원통하고 가슴저린 아픔의 나날을 어쩌지 못하여 내가 R형의 무덤을 찾아갈 때마다 그 꽃은 암벽에 부서지는 바닷물에 머리를 풀고 진분홍 꽃잎을 짓씹으며 핏빛 울음을 울고 있었으니까. 이런 슬픈 인연으로 맺어진 꽃이다. 그러기에 2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해당화는 나의 가슴속 깊은 곳에 뿌리를 박고 해마다 피는 꽃, 날마다 지는 꽃이 되어 버렸다.

5월이 되어 연분홍, 진분홍으로 피는 꽃이 어찌 해당화뿐이겠는가. 달리아도 있고, 튜립, 카네이션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죄다 유럽이나 북남미 대륙으로부터 굴러 들어온 남의 나라 꽃인데 비해, 해당화만은 고유한 우리네의 꽃이면서도 그들에게 밀려나 도리어 서지인 듯 바닷가에 홀로 피는 꽃이 되었다. 그러기에 더욱 애처롭고 서러운 꽃이다. 그러나 해당화는 서럽지만 서러움에 지치지 않고, 서러운 땅의 서러운 운명을 짊어지고도 천년 세월을 하루인 듯 참아내는 집념의 꽃, 기다림의 화신이기도 하다.

해당화! 춥거나 덥거나 간에 우리네 땅이라면 어디를 가리지 않고 줄기차게 피는 꽃, 남과 북을 가리지 않는다. 동과 서를 셈하지도 않는다. 초록의 바다가 있고, 그 바다의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딍구는 흰 모래밭이 있기만 하면 아무 데서나 다부지게 피는 꽃, 밟아 뭉개도 다시 뿌리내려 일어나는 한국인의 꽃이다. 그렇다. 기름진 옥토, 양지바른 꽃밭일랑 다른 꽃에게 깨끗이 양보할 줄 아는 여유와 미덕이 있기에, 이 땅 머슴애의 바다같이 넓은 가슴을 닮은 꽃이고, 목 놓아 부르다가 지쳐 차라리 망부석이 될지라도 십 년이고 백 년이고 가신 임을 기다릴 줄밖에 모르는 절개가 있기에 우리네의 열녀춘향을 닮은 꽃이다.

거센 바닷바람이 달려와 젖가슴을 풀어헤친 빨간 꽃잎을 포옹하고 격정적으로 몸부림치는, 뒹굴며 흰모래를 뒤집어쓰는 진한 그 한밤을 상상해 보라. 강인한 생명력이야 어찌 되었건, 빗질도 하지 않은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푸른 초원을 향해 맨발로 달려가는 젊고 발랄한 이십대 여인의 뜨거운 사랑이, 야성적인 정열이 거기 있지 않은가. 격정의 밤이 깊어 한 줄기 밧줄 같은 소나기라도 쏟아져 보라. 바람도 자고 맑게 갠 이튿날 아침, 하얀 모래밭에 흩어진 빨간 꽃잎들, 그 꽃잎들이야말로 임을 그리다 그리다 지쳐, 병실의 하얀 침대요 위에 쏟아놓은 30대 여인의 각혈이 아니겠는가.

올해도 봄이 오면, 아니 5월이 오면, 완충지대로 인적이 끊어진 Y섬에는 해당화가 피겠지. R형의 무덤가에도 원한이 사무친 망향의 넋이 되어 붉게 붉게 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