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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보경(寶鏡)을 품다 / 박경대

보경(寶鏡)을 품다 / 박경대

 

 

 

명경 같은 물이다. 물빛도 자연을 그대로 닮아 푸르다. 보경(寶鏡)을 품기 위해 새벽잠을 설쳤다. 심신이 쉬고 싶다는 신호를 보낼 때면 가끔 찾는 청하계곡이다. 혼탁한 마음을 맑은 거울처럼 닦아주고 잔잔한 물처럼 되기 위해 찾는 곳이다. 물에 비추어진 나를 보며 마음속을 들여다본다.

엊저녁, TV를 시청하던 중이었다. 어느 노스님이 나오더니 신도들을 둘러보며 하루에 거울을 몇 번 보느냐고 물었다. 법문이 끝나갈 무렵 엉뚱하게 던진 질문으로 모두들 의아해했다. 무슨 말씀을 하려고 저러시나 생각하며 스님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법당에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노스님이 미소를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얼굴을 보는 세간의 거울도 있지만 우리에겐 마음을 보는 거울도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스님은 거울에 얼룩이 묻으면 깨끗하게 볼 수가 없듯 마음에 때가 끼면 바른 생각을 할 수 없으니 늘 마음을 닦으라고 당부했다. 삶의 이치를 바르게 볼 수 있는 마음의 거울이 우리가 가진 최고의 보물이라는 말을 끝으로 법문을 마쳤다.

거울에 관한 법문을 들어서였을까. 불현듯 보경사에 가보고 싶었다. 잠을 설치며 동이 트기를 기다렸다. 여명이 창으로 밀려들자, 마실 물만 챙겨 아내와 훌쩍 떠나온 것이다. 이곳은 이름으로도 알 수 있듯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거울에 관한 일화가 있다.

1400여 년 전, ‘지명법사가 중국유학 중 도인으로부터 팔면보경이라는 신비한 거울을 얻게 되었다. 그것을 신라 진평왕에게 바치면서 동해안 명당에 거울을 묻고 사찰을 세우면 삼국을 통일할 수 있다고 아뢰었다. 그 말에 왕은 크게 기뻐하였다.

어느 날, 동해안을 시찰하던 왕이 오색구름에 덥혀있는 내연산을 발견하여 다가가 보았더니 산세가 범상치 않았다. 그곳이 길지임을 확신한 왕은 산기슭 연못에 보경을 던져 넣고 못을 메워 보경사를 창건 하였다는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청하(淸河)골이라 불리는 이곳은 이름처럼 골마다 맑은 물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있다. 산정에서 발원한 청수는 12폭포와 아름다운 소()를 만들며 솔숲 사이를 흘러내린다. 별칭인 소금강이라는 표현에 부족함이 없다.

더운 숨을 내쉬며 사찰 앞 송림으로 들어섰다. 바위에 걸터앉아 생각은 천년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연못의 위치를 가늠해 본다. 계곡물은 가람을 왼편에 두고 흐르고 있다. 물의 흐름과 법당의 위치로 보아 천왕문 뒤, 나지막이 있는 적광전이 연못의 자리임이 짐작된다. 연화의 세계에 계신다는 비로자나불을 이곳으로 모신 연유 또한 그러하리라. 마침 햇살이 내려쬐는 마당 한편에 연꽃이 피어있는 수조가 있어 메워진 연못을 대신하는 듯하다.

연못의 위치를 추측 하고나니 팔면보경은 어떻게 생긴 거울이었을까 하는 새로운 궁금증이 생긴다. 묻힌 세월이 오래되어 형태를 알 수 없으니 상상만 해 볼 뿐이다.

사찰이 창건된 연대는 602년이다. 당시 중국의 황궁에서 여덟 꽃잎의 문양으로 장식한 팔화경이라고 불리는 청동거울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우리나라 국보로 지정된 동경에도 팔각 면에 연꽃잎이 조각된 것이 있기에 아마 그와 유사하리라. 거울에 관한 상상은 연못에 던져 넣은 까닭으로 이어진다.

불교의 교리에 읽다보면 이란 숫자가 몇 번 나온다. 여덟 가지의 바른 길이라는 팔정도가 있고, 여덟 가지 괴로움이란 뜻의 팔고도 있다. 거울에는 바른 길을 걷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라는 뜻이 담겨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연꽃은 썩은 흙탕물에서도 탐스럽게 피어나는 가르침에 연못 속을 지옥계에 비유한 것이 아닐까. 거울을 연못에 던진 것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방편이었다면, 괴로움을 끊고 묻어 버린다는 팔고에 더 큰 뜻이 담겼으리라.

적광전에는 초로의 부인이 부처님을 향하여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상의가 땀으로 흠뻑 젖어 얼마나 예를 올렸는지 짐작되었다. 무슨 간절한 소망이 있기에 이 더운 날씨에 저토록 열심일까. 보경을 묻은 곳이니 여인의 대원은 꼭 이루어지리라.

부처님 전에 삼배를 한 뒤 가부좌를 틀고 촌음, 마음에 거울을 담아본다. 머릿속엔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떨어지는 폭포가 화두와 싸움을 한다. 깜박, 천상을 보았을까? 한순간, 어깨위로 내리치는 죽비소리의 환청에 현생을 찾는다.

천년의 세월을 넘겨 묻혀있는 보경이 중생의 고통과 번민을 잊어버리게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보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한 보물은 노스님이 말씀하셨던 자신의 행동을 올바르게 볼 수 있다는 마음의 거울이 아닐까.

사찰을 나서 행선(行禪)하듯 걸어본다. 보현, 문수, 관음……. 불호로 이어지는 폭포를 지나 소에 닿았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니 가슴까지 아려온다. 흘러가는 구름을 무심히 보고 있던 그 순간, 추억 하나가 떠오른다. 이곳은 사귀던 아내와 여행을 왔다가 결혼을 약속한 곳이 아니었던가. 내 가슴에 묻은 얼룩을 닦아 보경으로 만드는 아내까지 이곳에서 얻었으니 보경사는 이름값을 톡톡히 한 것이리라.

그때 건너편 바위에 앉아있던 아내도 이곳에서의 추억이 생각나는지 나를 보며 맑은 웃음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