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을 줍다 / 정하정
고구마 이삭줍기에 나섰다.
밭에 들어서자 모자를 쓰고 앞치마를 두른 여인들이 커다란 포대나 비닐봉지를 들고 엎드려 있거나 걸어 다니고 있었다. 밀레의 ‘이삭줍는 여인들’ 그림과 흡사했다. 그림 속 여인들은 당시 파리 외곽지역에서 힘들게 살아가던 농민들이지만 오늘 고구마밭에서 이삭을 줍던 여인들의 실상은 다르다.
몇 년 전부터 이 밭에서 이삭줍기를 해왔던 지인은, 가끔 ‘내 고구마가 잘 크고 있나!’ 밭을 기웃거리기도 했다면서 우스갯소리를 했다. 몇 고랑의 농사일지라도 직접 지으려면 가뭄에 신경 써야 하고 고라니와 멧돼지가 내려와 파헤치는 것도 막아야 하니 여간 힘든데 아니다. 그러니 이삭을 줍는 게 더 수월하고 양도 많다고, 아예 고구나 농사를 접었다고 했다.
밭의 가장자리에 묻혀 있던 고구마는 기계 작업이 수월하지 못해 거의 남겨진다. 앞서 온 사람들이 먼저 그곳을 공략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좋은 것을 한 번 훑어간 뒤였다. 못생긴 고구마들을 보는 족족 주워 담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한 포대가 되었다.
추수할 때 제대로 거두지 못한 농작물, 땅에 파묻혀 있거나 잘리거나 못 생겨서 상품을 수확하는 농부에게 뽑혀가지 못한 것, 그것이 요즘의 이삭이다. 한 톨 한 톨의 벼 이삭이 배고픔을 달랠 양식에 보태졌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상품성이 없는 것은 모두 내팽개쳐진다.
아직 마르지 않은 고구마 줄기를 당겨보았다. 거기서 커다란 고구마 하나가 따라 나온다. 여러 사람이 지나갔을 텐데 용케도 뽑혀가지 않고 나에게 걸렸다. 뒤늦게 내 손에 잡힌 잘생긴 고구마 하나, 생각하지 못했던 수확이 나를 들뜨게 했다.
찾다 보면 어디선가 하나쯤은 더 건질 수 있다는 생각에 구석구석 찾아보았다. ‘나 좀 가져가시오’하고 말을 건네는 듯 흙더미에서 얼굴을 빼꼼 내민 놈 하나도 만났다. 내 눈엔 다 멀쩡한 것들이다.
사람을 위해 먹거리가 되는 길이 나름 제 역학일 텐데 내게 잡히지 않으면 바로 썩어서 땅속에 묻힐 녀석들. 제 역할을 하도록 나는 그들을 거두었다.
저녁을 먹고 난 뒤, 출출한 시간이 되어 이삭 고구마 몇 개를 쪘다. 이쁜 놈 못생긴 놈 모두 다 맛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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