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렛 / 한경희
오후 햇살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바이올렛 화분에 골고루 비칩니다.
봄맞이로 뭘 들여놓을까 고민하는 제게 화원에서 바이올렛을 추천해주었습니다. 물을 자주 줄 필요가 없고 생명력이 강하다면서요. 저처럼 게으른 사람에게 안성맞춤이다 싶어 색깔별로 담아 왔습니다. 주인은 마치 큰 기밀이라도 발설하는 양 속닥였지요.
“잎사귀를 떼어서 흙에 꽂아두기만 하면 번식이 돼요.”
속는 셈 치고 두툼한 잎 다섯 장을 골라 빈 화분에 꽂았습니다. 보름이 지나도록 아무런 변화가 없었어요. 화원의 말과 달리 특별한 노하우가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아니면, 기르는 사람이 두어 번 물 준 것 말고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저 미물도 알아챘을 테지요. 식물도 사랑을 주면 꽃과 열매를 더 튼실하게 맺는다잖아요.
볕이 따가워지기 시작할 즈음이었어요. 빨래를 너는데 구석으로 밀쳐놨던 화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꽂아둔 잎사귀 옆으로 쥐눈이콩알만한 잎이 고개를 내밀고 있지 뭐예요. 친구들이 제 자식을 보면서 ‘예뻐 죽겠다.’고 하는 심정을 조금 이해했다면 지나친 걸까요. 저는 절대 알지 못할 거라 여겼던 감정 말입니다. 너무 사랑스럽고 예뻐서 눈물이 나려 했어요.
새잎이 하나 올라오고부터는 일사천리더군요. 엄지손가락만 해진 잎 옆으로 금세 서너 장이 더 올라왔습니다. 번식시킨 다섯 잎 중 네 개는 그렇게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한 잎만 처음 그대로였어요. 그 녀석을 보는데 왜 당신이 생각나던지.
당신 아니, 숙모는 꽃을 참 좋아했지요. 외할머니 댁에 커다란 가방을 들고 혼자 왔을 때에도 신문지에 둘둘 만 장미 한 다발을 내밀었습니다. 서울 여자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싶었지요. 정작 숙모를 보면서 저는 코스모스를 떠올렸어요. 그렇게 큰 키에 호리호리하고 청순한 여자는 처음 보았으니까요. 『토지』에서 김두수가 좋아하던 금녀가 실제로는 그런 모습일 거라고 상상했습니다.
숙모가 기거했던 방을 아직 잊지 않았나요. 침대와 조그만 서랍장만으로도 꽉 찼던 문간방 말이에요. 숙모는 몰랐겠지만 저는 자주 거길 드나들었습니다. 전 그때 어른들의 비밀을 엿보는 재미에 빠져 있었거든요. 장사하느라 정신없는 막내 이모의 편지를 훔쳐본 게 처음 시작이었어요. 할아버지의 수첩 속에 끼워진 기모노 입은 앳된 여자의 사진도 그때 봤었지요. 처음부터 작정하고 숙모의 비밀을 캐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낮잠을 자러 문간방에 들어간 날이었습니다. 침대 위에 수첩이 펼쳐져 있었어요. 매일의 체온이 적혀 있더군요. 제일 높은 숫자에 빨간 동그라미가 쳐져 있고요. 난자, 배란 같은 단어도 적혀 있었습니다. 막 학교에서 임신에 대해 배웠던 터라 저는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아챘습니다. 숙모가 오고 나서 동네 어른들이 쑥덕였던 말이 떠올랐어요. 숙모가 결혼한 지 몇 해가 지나도록 아이를 갖지 못했다는 거 말이에요.
그 당시만 해도 자식은 부부 사이에 없어서는 안 될 절대 가치였지요. 숙모는 고시 공부를 하려 절에 들어간 삼촌을 무작정 기다리기가 힘들었을 겁니다. 아니 불안했겠지요. 삼촌의 합격을 기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떨어지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조강지처는 버리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 있는 걸 보면, 예나 지금이나 성공한 남자가 본처를 배신하는 일이 심심찮다는 반증이겠지요. 삼촌이 1차 시험에 붙고 나서 숙모가 할머니네에 들어온 걸 보면 제 짐작이 틀리지 않을 거예요.
수첩을 보면서 삼촌이 다녀간 날까를 헤아려보았습니다. 몇 달에 한 번 올까 말까 한데 하필 동그라미 친 날은 모두 비켜 가 있었어요. 그런데도 숙모는 왜 그리 자신의 몸 상태를 매일 체크했는지, 저는 괜스레 서글퍼져서 수첩을 닫아버렸습니다.
아 참, 한 가지 더 고백할 게 있습니다. 점신에 저랑 라면을 먹었던 날을 기억하는지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항상 새 밥을 지어드리다가 처음으로 숙모가 라면을 끓였지요. 두 분이 일본 여행을 가신 날이었으니 떠오를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그때 뒷방에서 거울로 제 몸매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헐렁한 블라우스를 뒤로 잡아당기고 어깨를 한껏 젖히고 있었지요. 인기척을 느껴 뒤돌아보니 숙모가 반달눈을 하고 있었습니다.
발육이 늦었던 저는 성숙한 친구들을 부러워했어요. 일부러 더 크고 봉긋한 속옷을 입은 날이었습니다. 저는 부끄러워 얼른 옷을 내렸지요.
숙모가 라면을 끓이는 동안 문간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제 속내를 들켜버린 보상으로 숙모의 비밀 하나을 더 캐낼 심산이었습니다. 저는 침대 머릿장 뒤편에서 삼촌이 연애 시절 보냈던 편지 뭉치를 발견했어요. 라면 붇겠다고 숙모가 재차 부르지 않았다면 한 장만 읽진 않았을 거예요.
‘보고 싶은 OO야’로 시작되는 편지였습니다. 마치 제가 좋아하던 교회 오빠에게서 ‘실은 나도 널 좋아하고 있었다.’는 고백을 받는 기분이었어요. 붉어진 얼굴이 쉬이 가라앉질 않았지요. 삼촌이 이렇게 좋아했는데, 왜 이제는 전화도 편지도 하지 않고 잘 오지도 않는 건지 의아했습니다. 아니, 데면데면한 부부도 이리 열렬히 사랑하던 한때가 있었구나 싶어 종내에는 씁쓸해졌습니다. 그때 저는 사랑을 해조기도 전에 사랑의 허망한 실체를 먼저 알아버린 느낌이 들었습니다.
숙모는 라면을 듬뿍 담아주며 말했지요.
“괜찮아.”
저는 흠칫했습니다. 편지 훔쳐본 걸 들켰구나 싶었지요.
“나도 일부러 속옷 사이즈 크게 입는 걸.”
그때 살짝 붉어진 숙모의 얼굴은 장미꽃보다 더 아름다웠습니다.
숙모 아니, 당신이 떠나던 날이 생생합니다. 삼촌의 최종 합격 소식이 있고 난 몇 달 수였을 겁니다. 올 때보다 훨씬 단출해진 짐을 들고 있었지요. 할머니 할아버지는 배웅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게 떠나는 며느리를 보는 게 힘드셨을 겁니다. 막내 이모는 눈물을 훔쳤고 엄마는 연신 미안하다고 했지요. 당신은 건조하고 쓸쓸한 미소를 띠고 있었습니다. 처절하게 노력하고 그 결과를 깨끗이 받아들인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그런 미소 말입니다. 어떤 표정으로 어떤 인사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어정쩡하게 서 있는 제게 말했지요.
“나한테 잘해줘서 고마웠어.”
뭘 잘해줬는지 아무리 궁리해도 몰라서 저는 그날 밤 한참을 뒤척였습니다.
당신을 다시 본 건 친구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OO시에 갔을 때였습니다. 그곳이 친정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당신은 터미널 앞에서 야쿠르트를 팔고 있었어요. 베이지색 제복을 입고 모자를 눌러 썼지만 한눈에 알아보았지요. 여전히 코스모스처럼 가냘프고 청초하더군요. 하긴 십여 년이 흘러다 해도 고작 삼십 대 중반이었을 테니. 당신은 젊음이 시들기 전 마지막 빛을 사위는 처연함까지 덧대어져 예전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어쩌면 한없이 평온하고 초연해 보이는 아우라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몇 해 전 삼촌이 당신을 찾아갔었다고 하더군요. 외동딸의 이혼으로 속을 끓이던 친정어머니가 오랜 투병 끝에 돌아가신 직후였다고 들었습니다. 여전히 혼자 사는 전처가 가여웠던 건지. 새삼 조강지처를 버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던 건지 삼촌의 속마음이야 어찌 알겠습니까. 다만 가족들 모두 잘했다고 고개를 끄덕였지요. 뒤늦게 위자료라고 내민 거액을 끝내 받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그 돈을 거절했을까요.
인사를 건넬까 잠깐 고민했습니다. 당신은 제가 가까이 가도 알아보지 못하고 야쿠르트만 정리하더군요. 열네 살 소녀에서 숙녀가 된 저를 몰라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때 그냥 돌아선 건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입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당신은 잊었던 회한으로 한동안 쉬이 잠들지 못했을 테니까요.
새끼 바이올렛은 어느새 제 어미만큼 커졌습니다. 어미는 가장자리가 시커메지면서 등이 수그러들기 시작했고요. 그렇게 모든 새끼는 어미의 살을 먹고 자라나 푸르른 잎마다 이슬을 맺는가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새끼에게 다 내어주고 사그라져가는 바이올렛보다 끝내 새끼를 치지 못한 저 바이올렛 하나에 더 눈길이 갑니다. 더 애처롭습니다.
수많은 꽃 중에 간혹 저렇게 자신을 남기지 못하고 가는 꽃도 있나봅니다. 저 꽃은 저런 대로 이 꽃은 이런 대고 모두 어여쁘고 애틋합니다. 당신은 여전히 혼자 늙어간다지요. 지금은 어떤 꽃이 되어 있을지 궁금합니다.
아, 빠트린 말이 있네요. 삼촌은 끝내 자식을 얻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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