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덧없음 / 신형철

덧없음 / 신형철

(프로이트)

 

 

 

얼마 전 어느 여름날, 나는 말없이 과묵한 한 친구와 아직 나이는 젊지만 이미 명성을 날리고 있던 한 시인과 함께 환한 미소로 우리를 반기는 듯한 시골길을 산책한 적이 있었다. 그 시인은 주변 풍광의 아름다움에 대해 연신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그 아름다움 속에서 환희의 기분을 누리지는 못 하였다. 그는 이 모든 아름다움이 결국에는 소멸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 모든 인간적인 아름다움과 인간이 창조해 냈거나 창조할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이나 장관이 겨울이 오면 사라지고 없을 거라는 생각에 착잡한 심정이었던 모양이었다.

달리 말하면, 그가 사랑하고 찬미했던 모든 것들이 그에게는 덧없음의 운명으로 가치를 손상당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아름답고 완벽한 그 모든 것들이 소멸과 쇠퇴의 길로 나아 간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우리의 마음에 두 가지 서로 다른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는 그 젊은 시인이 느꼈을 것과 똑같은 가슴 저미는 상심이며, 또 하나는 그 명백한 사실에 대한 저항이다. 가령 이렇게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다! 자연과 예술의 이 모든 아름다움, 우리의 감각적 세계와 외부 세계의 그 모든 아름다움이 진정 그 허무한 무()로 사라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너무 무감각하고, 그리되리라는 운명 예단으로 그런 사실을 믿지 못 할 뿐이다. 이 아름다움은 지속될 수 있으며, 파괴의 모든 세력들을 다 이겨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멸에 대한 요구는 너무도 분명한 우리 소망의 산물로 사실 현실성은 없다. 모든 것은 소멸해 버린다는 고통스러운 인식이 진정 진실인 것이다.

모든 사물의 덧없음은 반박할 길이 없으며, 아름답고 완벽한 것을 예외로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나는 아름다운 것들이 그 덧없음으로 인해 나름의 소중한 가치마저 상실해 버린다는 식의 그 염세적인 시인의 견해에는 반박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반대로 그러한 덧없음으로 인해 아름다움의 가치가 더 증대되는 것이 아닌가!

향유의 가능성에 어떤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향유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이다. 감히 선언하건대 아름다운 것의 무상함이 그 아름다움을 즐기려는 우리의 마음에 방해가 된다는 것은 정말 이해 못 할 일이 아닌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자. 겨울이 되면 훼손되는 그 아름다움은 다음 해에 다시 찾아온다. 따라서 자연의 아름다움은 우리 인생의 길이와 견주어 볼 때 실제로 영원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 인간의 형체와 얼굴의 아름다움은 삶의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소멸되어 간다. 그러나 그런 덧없음만이 오히려 더욱 새로운 매력을 우리 삶에 부여하는 것이다. 아무리 하룻밤만 봉오리를 피우는 꽃이라 할지라도 그런 이유로 아름다움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나는 어떤 예술 작품이나 지적 성취물의 아름다움이나 완벽함이 시간적 한계 때문에 그 가치를 상실한다는 얘기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찬사를 보내는 미술품이나 조각상이 언젠가 부서져 없어질 날이 실제로 올 수 있다. 혹은 오늘날의 시인들이나 사상가들의 작품을 더 이상 이해하지 못 하는 세대가 출현할 날이 올 수도 있으며, 이 지상의 모든 생물들이 다 소멸되어 버리는 어떤 지질학상의 사건이 벌어질 날이 도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아름다움과 완벽함은 그것이 우리의 정서적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 삶보다 더 오래 존속해야 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그 아름다움과 완벽함은 절대적인 시간의 길이에 구속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나에게는 더 이상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당시 그 시인이나 친구에게 내 생각의 깊은 의미를 인상 깊게 심어 주지 못 했던 모양이었다. 결국 나는 어떤 정서상의 강력한 요인이 그들의 판단을 방해하고 있다고 추론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그 정서상의 요인이 무엇인지도 알아낼 수 있었다. 아름다움을 즐기려는 그들의 기분을 망친 것은 틀림없이 그들의 마음속에서 솟아난 슬픔에 대한 반발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아름다움이 덧없다는 생각은 그 예민한 마음을 가진 두 사람에게 사라질 아름다움에 대한 슬픔의 기분을 안겨 주었고, 그 결과 고통스러운 것을 피하려는 본능적인 마음의 작용으로 자신들의 아름다움의 향유가 그 덧없음에 대한 생각으로 방해받았던 것이다.

사랑하고 아끼는 것을 잃었을 때 슬퍼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감정이고, 그래서 그 슬픔을 자명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심리학자들에게 슬픔은 그 스스로 설명되지 않는 현상 중의 하나로, 그 원인을 추적해 봐야 분명히 밝혀지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것이다. 우리는 리비도라고 부르는 사랑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이 리비도는 성장의 초기 단계에 자아로 향해 있다. 비록 초기 단계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리비도는 나중에 자아에게서 벗어나 다른 대상으로 향하게 된다. 물론 그 대상도 어떤 의미에서는 자아 속에 들어 있다. 그런데 그 대상이 파괴되거나 상실되면 우리의 사랑의 능력(리비도)은 다시 해방되어 대신 다른 대상을 찾거나 아니면 일시적으로 우리 자아에게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리비도가 그 대상과 분리되는 것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 과정으로 나타나는지는 불가사의한 것이고, 아직 우리는 그것을 설명할 만한 어떤 가설도 세워놓지 못하고 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리비도가 어떤 대상에 집착한다는 것, 그리고 그 대상을 상실했을 때 비록 다른 대체물이 가까이에 있다 하더라도 애초의 그 대상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슬픔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 시인과 나눈 대화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 해 여름에 있었던 일이다. 1년 후 전쟁이 일어났고, 그 전쟁은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빼앗아 가 버렸다. 전쟁은 지나가는 길목의 시골의 아름다움을 파괴하고 귀중한 예술품들을 파괴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일궈 놓은 문명의 업적에 대한 우리의 자긍심과 많은 철학자와 예술가들에 대한 우리의 존경심, 그리고 국가나 인종 간의 차별을 딛고 일어서 결국 승리를 거두리라는 우리의 희망을 산산조각 내 버리고 말았다. 전쟁은 과학의 그 숭고한 불편 부당성에도 흠집을 내었으며, 우리의 본능을 속속들이 다 드러냈으며, 우리가 수 세기에 걸친 교육으로 고귀한 정신으로 길들여 왔다고 생각했던 우리 내면의 사악한 정신들을 다시 풀어 놓았던 것이다. 전쟁은 우리나라를 다시 작은 나라로 만들었으며, 우리를 세계의 다른 나라들과 더 멀어지게 만들었다. 전쟁은 우리가 사랑했던 많은 것들을 빼앗아 갔으며, 우리가 불멸의 것으로 간주했던 많은 것들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 눈으로 보여 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많은 대상을 잃어버린 우리의 리비도가 그나마 남겨진 대상에 더없이 강렬하게 집착하는 것에 놀라지 않는다. 우리나라에 대한 사랑, 우리 가까이에 있는 것들에게 대한 애정,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에 대한 자긍심이 돌연 전보다 더 강하게 일어나는 사실에 놀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상실해 버린 다른 소유물들이 아무리 쉽게 무너지고 무력하게 소멸되어 갔다고 해서 그것들이 진정 우리에게 무가치한 것이 되어 버린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그럴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소중한 것들이 그렇게 영속적이지 않음이 드러났기에 그냥 체념할 수밖에 없다는 마음을 지닌 그런 사람들이 실은 단순히 상실한 것에 대한 슬픔의 상태에 있는 것일 뿐이라고 믿는다. 우리의 슬픔이란, 그것이 아무리 고통스러운 것일지라도 결국엔 자연히 끝나고 만다. 잃어버린 그 모든 것들을 그냥 단념할 때, 슬픔은 스스로를 소진하며 우리의 리비도는 다시 자유롭게 되어(우리가 젊고 적극적인 한) 잃어버린 대상과 똑같은, 아니 그보다 더 소중한 새로운 대상을 찾게 된다. 전쟁으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는 희망을 품어 본다. 일단 슬픔이 끝나고 나면, 설혹 문명의 산물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더라도, 그 풍요로운 산물에 대한 우리의 소중한 마음에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것이다. 전쟁이 파괴해 놓은 것들을 우리는 다시 세우게 될 것이고, 그것도 전보다 더 튼튼한 기초 위에, 더욱더 오래 지탱할 기반 위에 세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프로이트가 1916년에 쓴 글인데, 인생에 대한 관조와 덧없음의 의미와 감정에 대해 유려한 필체로 이야기한다. 마치 수필가가 쓴 글처럼 보인다. 이 글에서 프로이트와 함께 했던 시인이 덧없음을 이렇게 슬픔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마도 그의 시인적 감수성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우리 역시 아무렇지도 않은 상황에서 낙엽이 떨어지는 모습만 보고도 무한히 센치해 질 수 있으니까. 프로이트가 이 글을 썼던 당시의 1916년은 초유의 세계대전이 한참 진행 중일 때의 상황이고,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죽음으로 내몰린 상태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전쟁의 참화를 겪고 있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덧없음의 서술 속에서 희망을 이야기하고, 오늘의 슬픔이 우리가 정신적으로 강해지는 토대가 되리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프로이트는 현재를 살라고 조언하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아름다움과 완벽함은 그것이 우리의 정서적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 삶보다 더 오래 존속해야 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그 아름다움과 완벽함은 절대적인 시간의 길이에 구속되지 않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견뎌내기만 한다면.개인적으로 아무리 큰 슬픔이라 하더라도 (너무나 감당하기 힘들고 어려운 슬픔이 많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신적으로 더 강해지는 것은 분명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