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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용서 / 박헌규

용서 / 박헌규


 

 

, 단풍이 보고 싶다 카드나?이렇게 말하고 싶지만, 환갑 진갑 다 지난 지금, 큰소리칠 형편이 못 된다. 요즘 친구들 모임에 가면 곰국, 이삿짐 사건, 까불지 마라등의 이야기가 자주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물론 웃으려고 하는 소리겠지만, 모두가 하나같이 남자들을 불쌍하게 만드는 말이다. 농담 속에 정말로 진담이 있을까 봐 두려움마저 든다.

일요일 아침 식사 후 설거지를 하던 아내가 거실 벽에 걸린 달력을 보고는 내일모래가 12월임을 확인하고는 푸념이 담긴 한마디를 뱉는다.

올해도 단풍 한 번 보지 못하고 가을이 다 지나가네.

그냥 흘려듣기에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그럼 단풍이 아직 남아 있으려나. 가까운 곳에라도 한번 나가볼까.

아내의 얼굴에 갑자기 화기(和氣)가 돈다. 아침밥을 늦게 먹었으니까 점심은 형편에 따라 중간에서 해결하기로 하고 집 안에 있는 물 한 병과 사탕 몇 알을 대충 챙겨 집을 나섰다. 모처럼 뜻이 척척 잘 맞는 것 같다. 내가 자주 찾는 영천 신녕 치산계곡으로 향했다. 치산계곡은 늘 맑은 물이 흐르고, 기암괴석, 울창한 소나무 숲, 가파르지 않은 오솔길이 있어 내가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계곡 입구 수도사()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늦은 가을이 몸에 와락 안긴다. 기온이 제법 쌀쌀하다. 산도 계곡도 모두가 겨울 채비에 들어간 듯 조용하다. 몇몇의 등산객만 보일 뿐이다. 지난여름 얼마나 많은 인파에 시달렸는지, 계곡 곳곳에 앓은 상처가 선명하다. 아내와 나는 오랜만에 저물어 가는 가을 낭만을 가슴으로 느끼며 소나무 숲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계곡 위쪽을 올라갈수록 가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니다. 계절의 틈에서 머무를 곳 없는 찬바람만이 물푸레나무 잔가지 사이로 외로운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있었다. 떨어진 단풍잎은 한기에 질린 듯 비명을 지르며 계곡 밑 개울가로 미끄러진다. 산등성이 바위틈 곳곳에는 가을이 서둘러 떠나고 초겨울 서리 맞은 흔적이 머물고 있었다. 한참을 걸어 중간쯤 오르다 보니 배에서 시장기를 알리는 신호가 연거푸 왔다. 사탕 한 알을 입 안에 굴리면서 정상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허기진 배를 안고 계곡 진불암에 도착하니 점심때가 훨씬 지났다. 배꼽시계가 계속 울어 댔다.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고 하늘에 별이 보이는 것 같았다. 마침 절에서는 김장 울력하는 신도님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주변 상황을 살펴보니 점심 공양은 이미 끝난 것 같았다. 벌건 양념을 덮어쓴 김치를 보니 입에 침이 절로 넘어간다. 공양간 안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설겅 위 라면 박스에 시선이 꽂힌다. 나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라면 두 봉지를 꺼내어 냄비에 끓이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보살님 한 분이 등 뒤에서 거사님은 라면은 가지고 오셨습니까?했다. 깜짝 놀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주 천연덕스럽게 , 지난주에 여기 한 박스 가져다 놓았는데요.했더니 맛있게 드세요.하며 김치 한 포기를 가지고 왔다. 늦은 점심시간, 차가운 날씨, 깊은 산속 산사에서 금방 버무린 김장 김치와 라면의 맛을 상상해 보라.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어떠한 진수성찬, 수라상도 여기에는 비견하지 못하리라.

김치 한 조각, 라면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았다. 아내도 겉으로 표현은 안 했어도 꽤나 시장기가 있었던 것 같다. 마음속으로 찬밥 한 덩어리 있었으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일 텐데약간의 호기를 부리며 기분 좋게 후식으로 커피까지 한 잔 마셨다. 그리고 법당으로 가서 부처님께 삼배하고 스님에게도 인사를 드렸다. 방금 전에 공양 간에서 라면 훔쳐 먹은 도둑인 줄 알 리 없는 스님.

거사님, 보살님 자주 오세요. 두 분 이렇게 같이 다니시니 참 보기 좋습니다. 성불하세요.

도둑을 자주 오라니……?

,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오.

혹자는 배가 부르면 아무 생각이 없다고 했지만, 나는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거짓말도 죄가 아닌가? 불가에서 죄는 첫째 몸으로 짓고, 둘째 입으로 짓고, 셋째 마음으로 짓는다고 했다. 오늘 나는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다 범했다. 이 큰 죄를 어쩌지?했더니 아내는 다음 주에 다시 와서 라면도 가져다 놓고, 스님께 솔직히 말씀 드리면서 부처님께 용서를 구하자.고 했다.

죄짓고는 못산다. 어디를 가든 나뿐 짓 하지 마라.우리 형제들에게 바르게 살아가도록 평소 귀가 따갑도록 일러 주시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것도 부처님 앞에서 조금도 거리낌 없이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해 가며 라면을 훔쳤다.

내려오는 발걸음이 오르막을 오를 때보다 훨씬 더 무겁다. 아니야, 대자대비 하신 부처님께서 이 어리석은 중생을 다 이해하고 용서하시겠지스스로 위로도 해 보지만, 마음은 편치가 않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