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 박헌규
‘왜, 단풍이 보고 싶다 카드나?’ 이렇게 말하고 싶지만, 환갑 진갑 다 지난 지금, 큰소리칠 형편이 못 된다. 요즘 친구들 모임에 가면 ‘곰국, 이삿짐 사건, 까불지 마라’ 등의 이야기가 자주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물론 웃으려고 하는 소리겠지만, 모두가 하나같이 남자들을 불쌍하게 만드는 말이다. 농담 속에 정말로 진담이 있을까 봐 두려움마저 든다.
일요일 아침 식사 후 설거지를 하던 아내가 거실 벽에 걸린 달력을 보고는 내일모래가 12월임을 확인하고는 푸념이 담긴 한마디를 뱉는다.
“올해도 단풍 한 번 보지 못하고 가을이 다 지나가네.”
그냥 흘려듣기에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그럼 단풍이 아직 남아 있으려나. 가까운 곳에라도 한번 나가볼까.”
아내의 얼굴에 갑자기 화기(和氣)가 돈다. 아침밥을 늦게 먹었으니까 점심은 형편에 따라 중간에서 해결하기로 하고 집 안에 있는 물 한 병과 사탕 몇 알을 대충 챙겨 집을 나섰다. 모처럼 뜻이 척척 잘 맞는 것 같다. 내가 자주 찾는 영천 신녕 치산계곡으로 향했다. 치산계곡은 늘 맑은 물이 흐르고, 기암괴석, 울창한 소나무 숲, 가파르지 않은 오솔길이 있어 내가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계곡 입구 수도사(寺)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늦은 가을이 몸에 와락 안긴다. 기온이 제법 쌀쌀하다. 산도 계곡도 모두가 겨울 채비에 들어간 듯 조용하다. 몇몇의 등산객만 보일 뿐이다. 지난여름 얼마나 많은 인파에 시달렸는지, 계곡 곳곳에 앓은 상처가 선명하다. 아내와 나는 오랜만에 저물어 가는 가을 낭만을 가슴으로 느끼며 소나무 숲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계곡 위쪽을 올라갈수록 가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니다. 계절의 틈에서 머무를 곳 없는 찬바람만이 물푸레나무 잔가지 사이로 외로운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있었다. 떨어진 단풍잎은 한기에 질린 듯 비명을 지르며 계곡 밑 개울가로 미끄러진다. 산등성이 바위틈 곳곳에는 가을이 서둘러 떠나고 초겨울 서리 맞은 흔적이 머물고 있었다. 한참을 걸어 중간쯤 오르다 보니 배에서 시장기를 알리는 신호가 연거푸 왔다. 사탕 한 알을 입 안에 굴리면서 정상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허기진 배를 안고 계곡 진불암에 도착하니 점심때가 훨씬 지났다. 배꼽시계가 계속 울어 댔다.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고 하늘에 별이 보이는 것 같았다. 마침 절에서는 김장 울력하는 신도님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주변 상황을 살펴보니 점심 공양은 이미 끝난 것 같았다. 벌건 양념을 덮어쓴 김치를 보니 입에 침이 절로 넘어간다. 공양간 안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설겅 위 라면 박스에 시선이 꽂힌다. 나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라면 두 봉지를 꺼내어 냄비에 끓이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보살님 한 분이 등 뒤에서 “거사님은 라면은 가지고 오셨습니까?” 했다. 깜짝 놀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주 천연덕스럽게 “예, 지난주에 여기 한 박스 가져다 놓았는데요.” 했더니 “맛있게 드세요.” 하며 김치 한 포기를 가지고 왔다. 늦은 점심시간, 차가운 날씨, 깊은 산속 산사에서 금방 버무린 김장 김치와 라면의 맛을 상상해 보라.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어떠한 진수성찬, 수라상도 여기에는 비견하지 못하리라.
김치 한 조각, 라면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았다. 아내도 겉으로 표현은 안 했어도 꽤나 시장기가 있었던 것 같다. 마음속으로 ‘찬밥 한 덩어리 있었으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일 텐데…’ 약간의 호기를 부리며 기분 좋게 후식으로 커피까지 한 잔 마셨다. 그리고 법당으로 가서 부처님께 삼배하고 스님에게도 인사를 드렸다. 방금 전에 공양 간에서 라면 훔쳐 먹은 도둑인 줄 알 리 없는 스님.
“거사님, 보살님 자주 오세요. 두 분 이렇게 같이 다니시니 참 보기 좋습니다. 성불하세요.”
도둑을 자주 오라니……?
“네,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오.”
혹자는 배가 부르면 아무 생각이 없다고 했지만, 나는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거짓말도 죄가 아닌가? “불가에서 죄는 첫째 몸으로 짓고, 둘째 입으로 짓고, 셋째 마음으로 짓는다고 했다. 오늘 나는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다 범했다. 이 큰 죄를 어쩌지?” 했더니 아내는 “다음 주에 다시 와서 라면도 가져다 놓고, 스님께 솔직히 말씀 드리면서 부처님께 용서를 구하자.”고 했다.
“죄짓고는 못산다. 어디를 가든 나뿐 짓 하지 마라.” 우리 형제들에게 바르게 살아가도록 평소 귀가 따갑도록 일러 주시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것도 부처님 앞에서 조금도 거리낌 없이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해 가며 라면을 훔쳤다.
내려오는 발걸음이 오르막을 오를 때보다 훨씬 더 무겁다. 아니야, ‘대자대비 하신 부처님께서 이 어리석은 중생을 다 이해하고 용서하시겠지’ 스스로 위로도 해 보지만, 마음은 편치가 않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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