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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호미질 소리 / 김귀선

호미질 소리 / 김귀선  

 

 

 

뜬금없이 며칠 전부터 호미질 소리가 아릿하게 들렸다. 흙과 자잘한 돌에 부딪치는 여린 쇳소리였다. 마무리해야 할 과제가 있어 집중을 하려해도 음향은 사라지지 않았다. 미련 없이 책을 덮었다. 늦은 점심을 급히 먹고는 두 시간 거리의 친정 동네를 향해 무작정 집을 나섰다.

거미줄로 어지러운 친정 헛간에서 호미를 찾아들고 마을회관 옆의 밭으로 향했다. 그 곳은 어머니가 지팡이를 짚어가며 돌아가실 때까지 호미질 했던 땅이다.

밭 한 편에 누워계신 부모님께 인사를 했다. 토끼풀 꽃 두 송이가 부모님의 손 인양 상석 뒤에서 한들거렸다. 밭에는 손가락 길이 정도의 들깨 모종이 줄을 지은 듯 두 포기씩 골고루 심어져 있었다. 진격해오는 적군처럼 밭고랑에는 좁쌀 크기의 자잘한 풀잎이 푸른 양탄자를 덮고 있었다,

호미질을 시작했다.

"크척크척"

가벼운 쇳소리에 낱낱의 감정이 한꺼번에 깨어나는지 가슴이 찌릿했다.

"크척크척"

야야 호미 끝을 어린뿌리에 갖다 대며 유야노 모종 가까이는 손으로 풀을 뽑아내야 한다. 자구 떠멍구 치지 말고 뿌리를 흙으로 돋아줘야지

엄마 목소리였다. 호미질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순간 허공에서 녹아진 듯 다른 잡소리만 옅게 들렸다. 주문을 외듯 더 빠르게 호미를 놀렸다. 엄마 목소리를 듣기 위해 온 신경을 귀로 몰아세웠다. 후르륵 한 차례 마른 바람이 지나갔다. 뒷산에서 젖어오는 뻐꾸기의 음향이 아련했다. 산골 동네의 오후는, 기도하듯 조용했다.

엄마는 호미질을 하고 어린 나는 콩밭 한편 넓적바위에 앉아있다. 어제는 앞밭, 그저께는 서갓골 깨밭, 오늘은 뒷골 밭을 맨다. 얼굴의 땀을 번갈아 팔로 훔치며 비탈진 밭에서 엄마는 종일 호미질 중이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희끄무레한 머릿수건을 다시 쓴다. 각다귀가 달려드는지 가끔 호미를 털썩 놓고 손으로 다리를 탁 친다. 풀숲 그늘에 덮어둔 물주전자를 들고서는 꼭지 채 벌컥벌컥 들이킨다. 잡풀로 자부룩한 건너 부추밭을 보며 혼자 중얼거린다.

해거름은 저 아래서 올라오고 나는 연방 하품을 한다. 손에 들린 노란 산나리가 고개를 비틀고 손등에 고꾸라져 있다. 멀리 던져버린다. 바위에 다리를 툭툭 치다가 흔들어도 본다. 엉덩이를 뒤로 당겨 벌러덩 눕는다. 하늘 바다에 구름이 흘러간다. 어지럽다. 뭉게구름 한 곳에 나무 막대기를 꽂아본다. 달콤한 솜사탕에 침이 고인다.

'크척크척'

'' 호박벌 소리가 가까이 왔다 멀어진다. 건너 산등성이에서 뻐꾸기 소리가 아련하다. 무쇠뚜껑 여닫는 둔탁한 음이 동네에서 올라온다. 송아지와 어미 소, 개 소리, 닭소리가 엇박자로 들린다. 골바람이 한 번씩 부드럽게 쓸어간다. 잡다한 소리는 '크척크척' 엄마의 호미질 소리로 녹아든다. 아롱아롱 잠속으로 빠진다.

'배고픈데 자지 말고 얼렁 집에 가거레이. 퍼뜩 해놓고 가꾸마.'

엄마의 목소리가 호미질 소리에 부드럽게 감긴다.

"크척크척"

야야 밭이 뭐 그리 매고 싶노 내사 마 엉기껑 난데이

엄마는 뭐한다꼬 그래 일을 마이 했노 이래도 한평생 저래도 한평생인데

그케 말이다 그래도 내가 배운기 있나 너거 옷도 사고 공책 연필도 사줄라카믄 그저 죽으나 사나 땅 파는 일 밖에 없었제

엄마 생각하믄 만날천날 땡볕에 앉아 밭 매던 모습만 떠오른다 카이 여름엔 땀띠가 나가 엄마 등이 게딱지처럼 버얼겄제 호미질 소리 들으면 엄마 생각부터 난데이.

빌껄 다 기억한다. 인자 가거래이 이서방 저역 늦겠다. 남은 거는 내가 퍼뜩 다 할 꺼이까내.

해거름에 밀리어 밭고랑을 나오는데 사라졌던 엄마소리가 또다시 들렸다.

'크척크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