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시계 / 공도현
사람이다. 집은 가족들이 모여 오순도순 얘기를 나눌 수 있을 정도면 그만이요, 먹는 것도 끼니 거르지 않고 먹을 수 있으면 된다. 특히 입고 나가는 옷은 편하면 장땡이다. 차도 굴러가면 되었지 더 큰 것을 욕심내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이 모습인지 모르겠지만, 그나마 알량한 자존심을 지켜주는 금시계는 하나 가지고 산다.
요즘은 금값이 비싸서 그런 풍토가 사라졌지만, 서른을 바라보는 큰아들의 돌 때만 해도 하객들은 반 돈, 한 돈짜리 금반지를 축하선물로 가져왔다. 돌 찬치는 백합이 활짝 핀 본가에서 지인들의 축하를 받으며 성대하게 벌어졌다. 할머니까지 사대가 한 집에 살다 보니 하객이 끊이지 않았다. 축하연은 우리 집안, 처가 식구, 내 친구, 아내 직장 동료들로 나누어 며칠에 걸쳐 이어졌다.
잔치가 끝나자 아내는 뼈 마디마디가 아프다며 자리에 누웠다. 며칠을 끌 것 같았던 몸살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말끔히 나왔다. 어머님이 전해준 보석함 때문이었다. 그 속에 가득 차 있는 금붙이를 보고는 거짓말처럼 얼굴에 생기가 돋아났다. 부자기 위에 쏟아 붓고 개수를 세는 동안 눈동자는 별을 헤는 아이처럼 반짝거렸다. 대부분 금반지였고 팔찌도 몇 개 보였다. 얼마 가지 않아 그것들은 아내의 목걸이와 팔찌가 되었다.
몇 년 뒤, 둘째 아들의 돌이 되었다. 그때도 사람들은 크고 작은 금붙이로 축하해 주었다. 아내는 큰아들 때 들어온 금붙이로 자신의 장신구를 만든 게 마음에 걸렸던지 이번에는 내 것을 해주겠다고 했다. 무엇이 좋을까 궁리 끝에 시계 금줄을 만들었다. 줄에 어울리는 금시계도 새로 장만했다.
사실 금시계는 ‘돼지 목에 금목걸이’처럼 나에게 과분했다. 일이 힘든 직장을 다니고 있을 때라 아무리 좋은 것도 제 값어치를 하기 힘들었다. 직장 동료들은 월급쟁이가 비싼 시계를 차고 다닌다고 부러움 반, 시기심 반으로 바라보았다. 나 역시 부담이 되었지만 아내의 배려가 고마워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차고 다녔다.
거추장스럽던 금시계는 내가 사업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가치를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서업체가 번듯해 보였는지 학교와 여러 관청에서 감투를 내밀었다. 그러자 모임이 자주 생겼고 그때마다 금시계는 나의 왼쪽 손목에서 번쩍이며 품위를 지켜 주었다. 고객들과 큰 금액의 계약서를 작성할 때도 나의 신뢰감을 높여주는데 한몫했다.
좋은 시절은 길지 않았다. 경쟁업체가 여러 곳 생기자 사업이 기울기 시작했다. 적자를 거듭하다 결국은 접게 되었다. 할일이 없어진 금시계는 다시 마음의 짐이 되었다. 아무리 빛이 나도 더는 내게 기쁨을 주지 못할뿐더러 곁에 찰싹 붙어서는 불편한 심기를 건드리기도 했다.
사업을 정리하여 실의에 빠져있는데 설상가상으로 뇌졸중이 찾아왔다. 나쁜 일은 서로 손을 잡고 달려드는 모양이었다. 다행히 출혈량이 많지 않아 수술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중환자실에서 숨 막히는 치료과정을 거쳐야 했다. 자칫하면 평생 불구로 지낼 수 있는 병이라 살얼음을 건듯 조심하였다.
힘겨운 투병 생활에서 겨우 벗어나 집에서 쉬고 있는 동안에도 돈 쓸 곳은 끊임없이 생겼다. 그때마다 아내에게 손 벌리기가 미안하고 자존심 또한 상했다. 고심 끝에 시계 금줄을 팔기로 마음먹었다. 몸이 망가지고 당장 돈 한 푼 없는 처지에 이까짓 금줄이 무슨 소용이랴 싶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아무 근심 없이 저 혼자 반짝거리고 있는 물건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 길로 망설임 없이 팔아치우고 미숫하게 생긴 시곗줄로 바꾸었다.
싸늘한 낯선 쇠붙이와 새로 짝을 맺자 번쩍이던 시계는 스스로 빛을 잃어갔다. 함께한 긴 긴 세월을 그리워하며 짝 잃은 설움을 토로하는 것만 같았다. 그 와중에도 행여 아내에게 들킬까 봐 집에 들어서기 무섭게 시계를 장롱 서랍에 숨겼다가 외출한 때 몰래 차고 나갔다.
며칠 후, 외출할 일이 생겨 장롱 서랍을 열었다. 어찌 된 일인지 시계가 보이지 않았다. 있을 만한 곳을 다 뒤져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냥 나갈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외출하면서 습관적으로 장롱 서랍을 열었는데 시계가 떡하니 제자리에 있는 것이 아닌가. 분명히 어제는 없었는데 하면서도 별생각 없이 시계를 팔목에 찼다. 현관을 나서는 순간 서늘한 기운이 머리를 관통했다. 분명 금줄이었다. 다시 보아도 내가 금장에 내다 팔았던 그 금줄이 틀림없었다.
퇴근하고 돌아온 아내의 목과 팔이 허전했다. 아내는 내가 줄을 판 것을 눈치 채고는 부랴부랴 금장으로 달려가 자신의 목걸이와 팔찌를 내주고 도로 찾아왔던 것이다. 하루만 늦었더라면 금줄을 녹일 뻔했다면 웃는 아내가 바보처럼 보였다. 당신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해도 부족한 사람인데 왜 팔았느냐며 나는 불같이 화를 냈다. 나 같은 사람에게 금줄 시계가 가당키나 하냐며 스스로 책망하는 소리를 아내에게 퍼부었다.
아내는 고개를 흔들더니 나는 아내와 애들에게 더없이 소중한 사람이라 금시계 하나 지니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고 어서 건강이나 되찾으라며 내 손을 꼭 쥐었다. 고마운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에 울컥 목이 메어왔다. 꼭 돈 많이 벌어서 더 좋은 목걸이 해주겠다고 울음 섞인 말을 하고 아내의 푸근한 가슴에 안겨 울먹이고 말았다.
다시 찾은 금시계는 아내와 두 아들의 사랑이 녹아있다. 시계를 찰 때마다 가족들이 함께 있는 듯 힘이 생겼다. 고된 재활 운동을 할 때는 열렬힌 응원을 해주었고, 술이나 담배를 하려는 마음이 생길 때는 간절히 말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금시계에 담긴 가족의 힘 덕분에 빠르게 예전의 건강한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지금도 나에게는 과분한 금시계지만 이제는 나의 분신이 되어 도저히 갈라설 수가 없다. 사랑하는 가족처럼 나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그것은 더 이상 시계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당당하라고 외치는 아내의 격려요, 이이들의 웃음이다.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지만 나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금시계가 있어 오늘도 어깨를 펴고 집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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