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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불목하니 / 윤영

불목하니 / 윤영

 

 

 

횃대에 앉은 닭이 울었다. 엄마는 윗목에 놓인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고는 부엌으로 나가셨다. 이내 쥐똥나무 아래를 터벅터벅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와 지겟작대기 끄는 소리가 난다. 이미 앞집 굴뚝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자신과의 약속인 듯 재락이는 아궁이에 불 지피는 일을 마쳤다. 다시 땔감을 하러 갈 시간이다. 동구 밖 느티나무를 투과한 먼동이 희붐하게 밝아오고, 아침상이 차려질 무렵이면 새벽에 떠났던 그가 돌아온다. 덩치보다 큰 나뭇단이 우리 집 앞을 지나고 우물가를 지나 앞집에서 멈춘다.

재락이는 내가 자랐던 고향 마을 앞집에 살던 총각 이름이다. 그 집의 머슴이었는지, 먼 친척뻘이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소싯적부터 살았던 것은 확실하다. 나보다 열서너 살은 더 많았을 법한데, 걸핏하면 우린 대놓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더벅머리에 납작한 코쭝배기, 푹 퍼진 입술에 콧방울 옆으로 주근깨가 다문다문 박혀 있었다. 똥짤막한 키에 제법 벌어진 어깨와 등에는 무슨 업보처럼 지게가 붙어 다녔다. 반들반들하게 닳은 지게를 지고는 예의 그 콧노래를 부르며 집을 나서는 모습은 누가 봐도 나무꾼이었다.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눈만 뜨면 산을 오른다. 황소바람이 부는 날은 집에서 장작을 패거나, 가을비가 듣는 날엔 먼 산을 오르는 대신 논밭 두둑이나 산발치에 있는 그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장맛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비료 포대를 뒤집어쓴 지게가 오랫동안 외양간 앞을 벗어나지 않았다. 겨우내 넘치던 썩은 나무둥치나 마른 가지도 녹음 무성한 여름이 오면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넘어가는 햇살에 양말짝이나 손수건을 빨아 담장에 올려놓고 고개를 들면, 동네가 훤히 보였다. 앞집 마당은 나무 부스러기, 지푸라기 하나 없이 정갈했고, 재락이가 쌓아 올린 나뭇단은 모판처럼 가지런했다. 볕이 바글거리는 칠팔월이면 낮잠 자고 일어난 그가 물 한 바가지 들이키고는 남은 물을 달아오른 담벼락에 퍼부었다.

저녁때가 되면 부지런히 물을 길었다. 우물가에 동네 아낙들이 수다를 떨거나 말거나 무심했다. 똬리를 틀어 물동이를 인 여인네들이 사라지고 나면, 그는 아기 손바닥만큼 고이는 샘에 고개를 박고 물을 퍼 올렸다. 두 개의 양철통이 차면 벌어진 어깨의 건재를 과시하듯 양쪽 쇠고리에 걸어 지고 몇 행비를 다녔다. 우물에서 앞집까지 가는 길은 개미 떼가 줄지어 가듯 젖은 흙이 까맣게 이어졌지만, 물지게 지는 일이 숙명인 듯 우직함을 보여주던 사내였다.

그는 늘 혈기왕성함보다는 진득함이 녹아있었다. 동네 사람 누구에게도 하등의 관심도 없었으며 또래 총각들에 비해 사납지도 않았다. 이따금 엄마가 일하고 있는 밭에 물 주전자를 들고 갈 날이 있었다. 가다 보면 인적 뜸한 음험한 곳집 근처 개울에서 등목하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어쩌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들킨 날에는 목덜미부터 붉어지며 물속에 몸을 감추던 순진무구한 총각이었다. 가을이 오면 미나리꽝에 떨어진 홍시를 통째로 삼키며 내려놓았던 나뭇단 지게를 또 지고는 내려갔다.

재락이가 사라졌다. 언제부터 보이지 않았는지 모른다. 다만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올라갈 무렵이었던 것 같다. 이웃 마을 참한 처자와 혼담이 있어 혼례를 치렀는지 도회지로 이사 간 주인집을 따라갔는지 알 수 없었다. 이후 풍문으로도 그의 소식은 듣지 못했을 뿐더러 한 올의 안부조차 떠올리지 못하고 살아왔다.

40여 년 만에 그를 다시 떠올린 것은 어느 소설의 한 구절 때문이었다. ‘머리를 깎은 지 삼 년 후에는 나무를 해다가 승방에 군불을 지피고, 스님들의 공양을 짓는 불목하니가 되었다.’라는 부분을 읽다가 소름이 돋았다. 어린 시절 무슨 업보처럼 지게와 한 몸 같았던 재락이의 모습이 영락없는 불목하니였다.

절에서 밥을 짓고, 땔나무를 하고, 물을 긷는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이 불목하니다. 지금은 사라진 직업이지만 조선 시대 중기부터 815광복 직후 시기까지 사내종을 뜻하였던 한국 고유의 전통적 직업이었다. 한국동란 직전 시기까지 한반도의 사찰에서는 흔히 있었던 불교색이 짙은 직업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절집에서 가장 낮은 사람임에 동시에 가장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나는 지금 생뚱맞게도 그가 어느 절집의 불목하니였을 거라고 믿고 있다는 거다. 그렇다면 어느 절간에서 왔을까. 종내에는 칠보산 자락이 품고 있던 사찰들까지 떠올렸다. 신라 시대 자장율사가 왕명에 의해 창건한 유금사에서 거처하다 왔을까. 아니라면 고려 말 공민왕 때의 나옹선사가 창건한 장육사에서 몸담았을까.

석삼년, 절간 집 땔감에 물 긷고 큰 스님 방에 불 지피다 돌아보니, 추녀 끝 낙숫물은 오늘의 빗물이건만, 오늘의 빗물은 어제의 빗물이 아님을 알기에는 까마득했을지도 모른다. 아직 사미계를 받지 못한 행자승을 보니 처량하기 그지없고 승려의 길은 멀기만 한 데, 어느 봄날 시주승을 따라나선 미륵골이 잊히지 않았을까. 그리하여 부전스님이 법당에서 부처님께 향촉 올리던 새벽녘 절집을 떠나 찾아든 곳이 나의 고향이었을까. 산길 내려오는 길 어슴푸레한 산문 밖에서 상좌스님이

이놈의 자슥 큰 스님 방에 불 지피지 않고 어딜 가느냐.”

그리하여 눈 감고 귀 닫고 망연한 세상 속으로, 무연의 마을에 닿았으리라.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늘 불을 숭배해 왔던 배화교처럼 불길 앞에 넋을 놓고 있었던 것 같다. 지나고 나니 피안이었던, 노스님 방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시절을 떠올렸던 걸까. 지게 걸러 메고 이산 저산 나뭇단 지고 내려오는 길, 지천으로 피었던 꽃들이 그리운 게였던가. 장작 패어 아궁이 옆에 쌓아놓고 서슬 푸르게 내리는 산문 밖 눈발을 보다가 마음씨 좋은 보살이 내주던 가래떡에 홍시 공양이 그리웠던가. 아니면 입적에 들었을 스님의 곁을 지켜보지 못한 한스러움인가.

하기야 그가 남의 집 종살이를 했다 한들 그게 무슨 대수랴. 자신의 일을 비루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족쇄에 대해 탓하지도 않고 순명했다. 무슨 일이든 소홀히 하지 않았다. 누구의 껍데기로도 살지 않았으며 자신만의 줏대로 골짜기를 남나들며 산처럼 살지 않았던가.

그는 고집스러우리만치 칠보산 자락의 산사내로 살았다. 웅숭깊은 골짜기의 나무들이 내보내는 경외감만 나뭇짐에 실었을 뿐이다. 누군 가당찮은 일이거나 하찮은 일이거나 해도 그 일을 경박해 하지 않았다. 나무 지게를 지고 물지게를 지는 일은 산중고혼의 고독감을 나눠주는 일이거나 수중고혼의 의로운 넋을 위무해주는 밀처럼 신성하게 여겼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