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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짜장면 / 공도현

짜장면 / 공도현

 

 

 

하얀 면 위에 아내의 파마머리 같은 까만 짜장이 덮여있다. 아내는 나무젓가락이 한가운데로 쫙 갈라지자 기분이 좋은 듯 생긋 웃고 짜장을 버무리기 시작한다. 한 손으로 비비다가 여의치 않은지 두 손으로 비빈다. 입은 곧 들어올 짜장면으로 벌써 오물거리고 있다. 아내가 짜장면을 앞에 두고 앉은 모습을 보다 옛날 일이 어제 일처럼 다가온다.

이제 서른을 바라보는 아들이 첫돌을 지내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혼자 걸을 수 있게 되어 달성공원으로 나들이 갔다. 층층시하 어른들과 한 집에 살고 있던 때라 처음으로 나선 가족의 나들이였다. 아내는 해방감에 취해 태어나 첫 소풍 가는 아들보다 더 들떠 있었다.

일찍 서둘렀지만, 아침 설거지와 집 안 청소까지 마치다 보니 공원에 도착 했을 때는 이미 점심시간이 되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길 건너 중국집이 보였다. 특별한 날이라 평소에 시키지 않던 간짜장을 주문했다. 아들은 처음 맛본 짜장면 맛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나는 처자식 거느리고 나들이 나와 외식하니 기분이 뿌듯했다. 그제야 진정한 가장이 된 듯했다.

앞에 앉아 짜장면을 한 가닥씩 입에 넣던 아내가 몇 번 훌쩍대더니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깜짝 놀라 우는 이유를 물었다. 아내는 첫 나들이에 짜장면이 뭐냐며 울먹였다. 처음 만났을 때 된장찌개 사준 얘기까지 꺼내며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다음에 스테이크 사준다는 말만 하면 그칠 텐데 그 말을 못했다. 비용도 부담되었지만, 두 살배기 아들은 제 어미가 울든 말든 온 얼굴, 옷에 짜장을 묻히면서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것도 있느냐는 듯 정신없이 먹어댔다. 눈물 때문에 화장이 얼룩진 아내를 달래고 식곤증으로 곤히 잠든 아들을 업고 달성공원을 순례하듯 한 바퀴 돌았다. 그 이후 아내와 외식할 때는 짜장면은 먹지 않는다. 달성공원에도 가지 않았다.

그리고 강산이 세 번 바뀌었다. 면발같이 티 없이 맑았던 아내는 먹어보기 전에는 재료가 무엇인지 모르게 검은 짜장으로 덮여 있는 짜장면 같은 결혼생활을 슬기롭게 헤쳐 나왔다. 직장에서의 퇴출, 나의 중병과 사업 실패로 힘든 일이 없지 않았지만, 지금은 누가 봐도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냈다.

오늘 아내는 누구와 전화를 하더니 나에게 팔공산으로 가자고 했다. 지인의 밭에 있는 방풍, 미나리, 머위 등 봄나물 생각에 마음이 들떠 보였다. 집을 나서고 보니 시간이 어중간하여 점심을 먹고 가야 했다. 팔공산에 접어들자 닭백숙을 비롯해 묵, 오리, 칼국수 등 식당이 입맛대로 줄지어 있었다.

아내에게 뭘 먹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난데없이 짜장면이 먹고 싶다고 했다. 우리 사이에서 금기어가 되다시피 한 짜장면이라는 말이 망설임 없이 나왔다. 나는 힐끗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개똥도 약에 쓸려면 없다더니 아무리 찾아도 중국집이 보이지 않았다. 가려는 밭에서 이십 리나 더 차를 달려 겨우 왕손 수타 짜장이라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아내가 짜장면을 너무 잘 먹는다. 맛이 좋은지 오물오물 씹으며 다음 차례로 입에 들어갈 면을 젓가락에 감고 있다. 먹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자 아내는 안 먹고 뭐 하냐고 한마디 하고 다시 면을 입을 가져간다. 짜장면을 좋아하는 줄 몰랐다고 하자 아내도 그날이 떠올랐는지 씩 웃는다. 그때는 내가 계산했고, 지금은 자기가 계산하니 괜찮다고 농담까지 한다.

그동안 무엇이 아내를 변화시켰을까. 젊은 시절엔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고 싶어 했는데 지금은 길가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젓가락에 묻은 양념까지 쪽쪽 빨아가며 잘도 먹는다. 아내는 우리 결혼 당시의 어머니보다 아이가 많다. 신혼 때 시어머니를 흉보던 거의 모든 행동을 답습하고 있다. 급히 외출할 때 내의 위에 브래지어 하기, 자면서도 텔레비전 채널 못 돌리게 하기, 심지어 제발 그만하기 바랐던 대구탕을 겨울이 다 가도록 끓여 밥상 위에 올리고 있다.

아내는 예전에 없을 때와 뭐든 사 먹을 수 있는 지금과는 짜장면 맛이 다르다고 한다. 그때보다 형편이 좋아진 건 사실이다. 아내가 짜장면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뿐만은 아닐 거다. 시어머니 인생이 결국 나이 먹은 자신의 모습이란 걸, 세상살이가 짜장과 면을 섞는 것처럼 어울렁더울렁 사는 거라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짜장면이 해금되었으니 달성공원에도 한번 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