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 조일희
K 문고에 가면 빼놓지 않고 들르는 코너가 있다. 그 가게는 만년필부터 독특한 모양의 안경테와 서류 가방까지, 여자보다는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물건으로 채워져 있다. 나는 그중에서도 만년필 앞에서 한참을 머무른다.
이런저런 모양의 만년필을 구경하다 보면 분주했던 마음도 차분해지고, 끼적거리고 싶은 충동이 손끝에서 저릿하게 올라온다. 사실 편리함에서 보자면 만년필은 다른 필기구에 비해 한참을 밀린다. 몸통을 열어 비어있는 통 안에 잉크를 채워 넣고 펜촉 끝으로 잉크가 나올 때까지는 작은 수고와 약간의 시간마저 필요하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빠르고 편리한 것을 좇아간다. 버튼만 누르면 심이 나오는 간편한 볼펜에 밀려 만년필은 시나브로 사람들 손에서 멀어졌다. 그렇게 세월 뒤편으로 사라진 만년필이 요즘 들어 부쩍 눈에 띈다. 빠른 속도에 지친 이들이 느리지만 쉼이 있고, 번거롭지만 여유를 주는 만년필의 아날로그 정서가 그리워서 다시 찾는 게 아닐까 싶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는 대부분 아이들이 만년필이나 작은 한영사전을 선물로 받았었다. 중학교에 들어간 후 아이들은 선물 받은 만년필로 영어 알파벳도 쓰고 어려운 한자도 쓱쓱 써 내려갔다. 나는 만년필 대신 기다란 자루가 달린 펜대에 뾰족한 펜촉을 꽂아 옹송그리고 글씨를 썼다. 내 눈에는 펜글씨보다 만년필로 쓴 친구들의 글씨가 반듯하니 단정해 보였다.
"나 한 번만 써 보면 안 될까?" 짝꿍의 만년필을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그만 속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버렸다. 짝꿍은 한참 동안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다가 "잠깐만 쓰고 줘야 해. 알았지" 거듭 다짐을 받고 나서야 만년필을 내게 건넸다.
어쩌다 그 만년필을 잃어버렸을까. 만년필을 돌려달라고 채근할 때마다 애꿎은 필통만 만지작거릴 뿐,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병이라도 나서 학교에 가지 않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하지만 그런 요행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 날, 기적처럼 행운이 찾아왔다. 내가 우리 학교 대표로 시장 상을 받게 된 것이다. 게다가 부상으로 시장님 이름이 새겨진 만년필까지 받다니. 금빛으로 빛나는 만년필을 가만히 손에 쥐어보았다. 닦달하는 짝꿍의 모습과 만년필을 갖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섞여 만년필은 묵직했다. '줄까, 아니야 주기 싫어' 두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만년필을 받아든 짝꿍은 잠깐 겸연쩍은 표정을 짓더니 금세 입이 헤벌쭉 해졌다. 홀가분했다. 아니 아까웠다.
지금 내 필통에는 두 자루의 만년필이 있다. 글 마당에 첫발을 내디딜 때 K 문고를 찾았다. 일찍이 점찍어 둔 만년필을 나 자신에게 선물하며 글쓰기라는 먼 길을 떠나는 내게 용기를 주고 싶었다. 만년필은 듬직한 몸체에 펜촉까지 굵어서 잘 차려입은 영국 신사처럼 멋졌다. 영국 신사는 호위병처럼 내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다녔다.
어느 날부터 글씨가 옆으로 번졌다. 무거운 촉 때문에 얇은 종이 뒤로 잉크가 배어 나온 탓이다. 다시 만년필 매장을 찾았다. 이번에 고른 만년필은 파란색 몸체에 가는 펜촉이 있는 매끈한 모양새다.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종이 위를 움직이는 만년필은 왈츠를 주는 무희처럼 날씬하고 아름다웠다. 그 후로 사용하는 종이에 따라, 그날의 기분에 따라 두 개의 만년필을 번갈아 데리고 다녔다.
만년필과 내가 처음부터 친했던 것은 아니다. 만년필은 제 생긴 대로 살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나는 그런 만년필이 못마땅해 자꾸 트집을 잡았더랬다. 사람이나 사물이나 조율의 시간이 필요하거늘. 만년필은 서서히 고집을 꺾고 내가 이끄는 대로 따라왔다. 뾰족했던 촉도 내 글씨체에 맞춰 둥글게 얼굴을 바꾸었다. 옛 선비도 붓을 벗이라 칭하지 않았던가. 만년필을 손에 쥐면 마음이 통하는 친구처럼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에 은근히 퍼졌다.
삶에 치여 한동안 필통 속 만년필을 잊고 살았다. 그사이 몸통은 바싹 말랐고 날렵했던 촉은 무뎌졌다. 따스한 물로 속을 달래주자 시부저기 마음을 푼다. 신선한 블루 색 잉크를 넣어 주니 두 친구는 예전의 생기 넘치는 모습으로 돌아온다.
잉크가 마르는 동안 가만가만 헝클어진 글머리를 풀어본다. 오랜만이다. 이 충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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