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사표 / 공도현
환경공단에서 공무직을 모집했다. 나는 계약직이라 11월 말이면 실업자가 된다. 내년 봄 다시 새로운 계약을 맺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뽑힌다는 보장만 있다면 구직활동지원금(실업수당)을 받으며 서너 달 쉬는 것도 괜찮다. 문제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데 있다. 정년이 다 되어가는 나이지만 과감하게 출사표를 던졌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이순이 다되어 내 인생을 되돌아보니 너무나 안일하게 살았고 더 나은 나를 위해 도전한 적이 없었다. 직장도 아버지 친구, 선배들, 외삼촌이 경영하는 회사에 연줄로 들어갔다. 했던 장사도 중고차상사, 편의점 같은 자본만 있으면 쉽게 할 수 있는 종목이었다. 내 존재감을 확인하고 싶은 도전 의식이 불타올랐다.
시험공부 하기 위해 교재를 구했다. NCS(직업기초능력평가+직무수행능력평가) 책을 펼치는 순간 뭐가 크게 잘못이었다는 걸 느꼈다. 일반상식이나 국사처럼 암기만하면 맞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문제해결 능력을 평가하기 위해 다섯 명 중 두 명은 참을 얘기했고 셋은 거짓을 말했으니 답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형사도 아니고 최근에 편의점을 했고, 작년부터 수목 관리하는 나로서는 뜬구름 잡는 얘기였다.
시험을 물릴 수 없었다. 내 몫으로 돌아오는 집안일을 줄여 보려고 아내와 아들에게는 이미 얘기했다. 아내는 줄여 주는 데 그치지 않고 고3 입시생 대하듯 했다. 일체 집안일은 손 못 대게 했고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내가 시끄러울까 봐 텔레비전도 소리 죽여 보았다. 아내의 배려는 눈물 나게 고맙지만, 되지도 않는 공부 하려고 책상에 앉아있으니 온몸에 좀이 쑤시고 잠이 저절로 왔다. 시험 당락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가족들에게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더 중요하게 되었다. 멀리서 부모님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공부하는 척했던 학창시절로 되돌아갔다.
아내의 배려로 책상에 앉은 지 하루, 이틀이 지나고 일 주 이 주가 지났다. 처음 영어책을 펼쳤을 때 지렁이로만 보이다가 차차 알파벳이 되듯 말도 되지 않았다고 여겼던 참, 거짓을 분간하게 되고 오랜만에 접한 수학도 간단한 문제는 척척 풀었다. 속이 자존감으로 꽉 차올랐다. 합격한 내 모습을 상상하며 웃음을 지었다.
시럼이 있는 날은 전날부터 태풍이 몰아쳤다. 평생 처음 치르는 구직시험에 나도 모르게 긴장되어 화장실에 몇 번을 갔는지 모른다. 한 시간이나 일찍 출발했지만 일대는 벌써 주차하려는 차로 뒤엉켜 있었다. 차는 움직이지 않은 채 시간은 흘러만 갔다. 이러다 시험 못 치르는 건 아닌가, 대중교통 이용하랄 때 들을 걸 하며 마음 졸이자 다시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근처 주차는 포기하고 화장실이 딸린 인근 공원까지 차를 몰았다. 남은 시간 이십 분, 늦지 않게 태풍 속을 바람처럼 달렸다.
시험장에 들어선 순간, 처음 NCS 교재를 펼칠 때보다 몇 배나 강한 충격을 받았다. 내가 보는 공무직은 정식 직원이 아닌 무기계약직을 말한다. 당연히 직급도 낮고 일도 험하다. 공무원 준비하는 사람들, 공부 좀 한 사람들은 일반직 시험을 보고 나 같은 사람들이나 공무직 시험을 본다고 생각했다. 열 명 남짓 뽑는 공무직 시험에 오백 명이 넘는 젊은 구직자들이 몰려들었다. 말로만 듣던 청년실업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절실하게 피부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스물네 명이 치는 교실에 내가 나이가 제일 많은 건 물론이고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이 대부분이었다. 일자리를 구해야 장가를 갈 테고 그래야 아기를 낳을 텐데 나라의 앞날이 눈앞에 참담하게 펼쳐져 있었다. 만약 내가 된다면 한 명의 젊은이 인생을 망치는 게 아닐까. 조용히 일어나 집으로 갈까 하는 생각도 했다.
불쌍한 건 젊은이만이 아니었다. 험한 세상살이 헤쳐 나가다 건강을 돌보지 못해 뇌졸중을 앓고, 있는 돈 없는 돈 끌어 모아 장사한다고 다 날린 내 처지가 그들보다 나은 게 없었다. 아직 공부를 마치지 못한 이들도 있어 누구를 봐줄 처지가 아니었다. 그보다 그들과 경쟁해서 이기고 싶은 승부욕이 끓어올랐다. 서로 힘든 처지니 정정당당하게 한판 붙어보리라 마음먹었다.
시험이 끝났다. 한동안 어깨를 짓눌렀던 시험이 끝나자 날아갈 기분이었다. 가족들이 합격을 기대하지 못하도록 시험장 분위기를 자세히 설명했다. 아내와 아들도 꾸준히 구직학원에 다니는 젊은이들을 어떻게 이기겠냐는 분위기였다. 혼자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특별히 어려운 문제도 없었고, 시간도 부족하기 않았으니 혹 합격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때 태풍과 함께 비구름은 사리지고 뭉게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언뜻 보이더니 눈부신 햇살이 집안을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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