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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아기 냄새 / 최춘

 

아기 냄새 / 최춘

 

 

 

아주머니, 공과금은 제가 낼 거고 월세는 우리 오빠가 낼 거예요.”

탤런트 김태희보다 예쁜 여자가 말했다. 한 남자와 나란히 앉은 그녀. 그들은 신혼부부다. 공인중개사무소에서 임대차 계약서를 작성하는데 임차인은 새댁이고 보증금은 그녀의 신랑이 즉석에서 휴대폰으로 내 통장으로 송금했다.

내가 이십여 년 동안 모아 둔 계약서를 보면 임차인은 으레 남편이었다. 남편은 직장에 다니고 아내가 아이들을 키우며 살림하고 공과금과 월세를 대신 냈다.

그런데 요즘 입주하는 부부들은 예전에 살던 사람들과 다르다. 부부가 함께 직장에 다니며 임차인은 아내이다. 보증금과 월세는 남편이 내고 공과금은 아내가 직접 낸다.

남편이 전업주부인 외벌이 부부도 있다. 남자는 시장을 보고, 요리를 하며 설거지도 한다. 아침 햇살을 마주하고 마당 끝에 있는 건조대 앞에서 빨래를 탈탈 털어 널거나, 저녁놀을 등지고 가족들의 마른 빨래를 걷는 일도 자연스럽다. 물론 월세와 공과금도 남자가 낸다.

달라진 세상. 맞벌이 신혼부부가 각자 부담하며 산다는 것, 맞벌이 부부가 늘어난다는 것, 남자 전업주부도 늘어난다는 것. 아무리 신문과 방송에서 보고 들었지만 내게는 낯설다. 특히 아기를 낳지 않는 신혼부부가 늘고 있다는 것은 더더욱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집 아래층 사람들을 보면서 그것을 실감하게 된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아래층 사람들 중에는 아기 있는 부부가 있었고 유치원 다니는 아이를 둔 부부도 있었다. 마당 이 쪽에서 저 쪽 끝까지 매어 놓은 빨랫줄에서는 기저귀와 아기 옷들이 나란히 햇볕을 받으며 그네를 탔다. 그리고 대추나무 그늘 아래 돗자리에서는 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 저녁을 맞이했다. 아기는 퇴근하는 아빠를 반기며 방긋방긋 웃고 아빠가 흔드는 딸랑이 소리에 까르르 웃었다.

언제부턴가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신혼부부가 입주해서 몇 년을 살아도 허리를 한껏 뒤로 젖히고 뒤뚱거리며 걷는 임신부 모습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세입자가 바뀔 때마다 은근히 아기 있는 젊은 부부가 입주하기를 기대했다.

어느 날 내 바람과는 상관없이 노부부가 들어왔다. 얼마 후 그들의 조카부부가 두 살 된 아기를 데리고 들어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들은 사람 수가 늘어난 걸 미안하다고 했지만 나는 아기가 있어서 기쁘게 맞이했다. 그 집 문 앞을 지나 계단을 오를 때는 아기 냄새가 나서 좋았다. 그런데다가 함박눈 소복소복 쌓이는 날, 아기엄마가 둘째아이를 낳았다. 우리 집 경사처럼 기분 좋았다. 눈길을 걸어 시장을 다녀오는데 내 발걸음 소리마저 나를 설레게 했다. 미역과 쇠고기를 아기엄마에게 건네주고 돌아서는데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복덩어리!”

마치 내 집 곳곳에서 부챗살 모양으로 생명의 빛이 솟아나는 느낌이었다. 햇살도 사뿐사뿐 담을 타며 춤추는 듯 반짝였다. 괜스레 실없는 사람처럼 빙그레 웃고 어깨도 들썩거리곤 했다.

겨울밤, 별들이 반짝이는 밤, 아직 눈도 못 맞추는 아기가 운다.

어디가 아픈 걸까. 기저귀 갈아 달라는 걸까. 그냥, 그냥 엄마한테 떼쓰는 걸까.

아기는 나에게 두 손을 가슴에 얹고 기도하게 한다. 그러다가 어느새 엄마와 말을 주고받으며 고요히 마음에 평화를 준다.

옹아, 오옹아, 옹알옹알.”

어이쿠, ~ 그래쪄, 어구구구 어이쿠.”

까르르르, 카캬캬캬.”

아기 웃음소리가 별에 닿을 듯하다.

아기가 내는 모든 소리는 복을 부르는 소리이고 평화의 종소리다. 엄마만 알아듣는 옹알이가 들려오는 이 순간, 언뜻언뜻 코끝을 스치는 아기 냄새가 좋다. 한 울타리 안에서 아기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고맙다.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