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여자와 여인 그리고 여편네 / 윤영

여자와 여인 그리고 여편네 / 윤영

 

 

 

지갑을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찰칵 소리가 이렇듯 깊은 단절로 다가옴은 무엇 때문일까. 비상유도등이 층마다 켜진 계단을 한 걸음씩 내딛는 야심한 밤. 일층에 다다르고서야 갈 곳이 없음을 알겠구나.

외출에서 돌아와 남편과 유쾌하게 술 한잔했다. 사는 거 무에 그리 무거울 필요가 있겠느냐며 당신만 있으면 만사형통이라고 속살거렸다. 이쯤에서 딸아이 중간고사 성적표가 손에 들어오자 일순간 정적이 술상을 휘감았다. 둘의 언쟁이 급기야 가족의 분쟁으로 확대되었다. 내 편이라고 믿었던 아들까지 모든 책임이 엄마 탓이라니쓸데없이 돌아다니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성적이 이 모양이란다. 섬뜩하리만치 일침을 가하는 가족의 서슬 푸른 촉수에 나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대들었다.

여자보다 여인으로 살아온 20여 년이 스쳐 간다. 막상 나오긴 했는데 발걸음을 어디로 둬야 할지 난감했다. 누구를 불러낼까. 선뜻 떠오르는 이가 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근 십 수 년을 도시의 작은 변방에서 살았건만 동네에 차 한 잔 마실 수 있는 사람이 없다니. 멀리 있는 친구를 부르기엔 초저녁잠이 많아서 안 될 것 같고, 근처에 사는 모 작가는 사모님이 오해하시겠지. 위층 친구는 오늘 서해안으로 떠나 부재중이고 친한 후배는 여행을 가벼렸으니. 마음 같아서는 어디 가서 여남은 병의 술이나 왕창 마시고 남편한테 디밀고 싶었지만 말 대로 마음뿐이었다.

어찌 되었건 현금인출기에서 나를 위해 보상이라도 받아내야 할 것처럼 두툼하게 돈을 찾았다. 잠깐이지만 적금통장 챙겨 나오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오늘 밤 어디서 꼽추잠이라도 자야 하는데 갈 곳이 없다. 묵직한 유리문을 밀고 나오기가 왜 이리 버거운지 비상벨이라도 누른다면 구군가가 달여와 주려나. 벼랑 끝에 선 기분이다. 아직 할인점 간판에 불이 환하다. 빈 바구니를 들고 몇 바퀴째 돌았을까. 계산원은 마감을 하려는지 분주하다. 제과점 직원이 켜놓은 텔레비전에서는 드라마가 한창이다.

여편네가 하는 게 뭐 있어. 소득 없는 일에나 싸돌아다닐 줄 알았지. 얘들 공부나 업그레이드시키시지. 니가 하는 게 뭐 있어?”

몇 시간 전 우리 집 분위기나 다름없잖은가. 머잖아 내게 다가올 여편네 호칭을 거부라도 하듯 황급히 자리를 떴다. 요즘 밥이 안 넘어간다는 수험생 아들을 위해 크림빵과 국물 없이 밥을 먹지 못하는 남편을 위해 국거리를 담았다. 이 상황에서 식구들의 식성대로 장을 보고, 소품과 반찬 그릇, 앞치마를 사고 있는 나. 참 별꼴이다 싶어 울화통이 치민다. 작정하고 보름 정도 집을 비워야겠다는 생각은 뭐였나. 장바구니에 담긴 그것들이 잣대 없는 날 보고 비웃는다. 이제 장 보따리를 들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오밀조밀한 아파트단지마저 밤이 깊어지자 한산하기 이를 데 없다. 단골 화장품 가게 주인은 아침거리를 봤는지 마트 봉지가 무거워 보였다. 언제 시간 되면 커피 한잔하잔다. 교대 근무를 마쳤는지 퇴근하던 남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말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고, 아들 또래의 아이들은 요즘 휴행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춤사위에 빠졌다.

맥주 한 캔을 사서 헬스장 모퉁이에 앉았다. 베란다 불빛이 벽돌담에 뚫린 개구멍처럼 뻐끔뻐끔 보일 뿐. 오동나무 이파리가 잔기침하듯 쿨룩거린다. 아는 사람 천지 하나 없는 내 앞에 찬거리만 두툼한 비닐봉지가 쓸쓸하다. 어쩔 수 없이 다시 깃들 그 집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막차에서 내린 여자의 구두 굽 소리가 카랑카랑 소리를 내며 지난다. 젊은 날 내 굽 소리도 저렇지 않았을까. 펑퍼짐하게 닳아빠진 슬리퍼 뒤축, 마지막 자존심을 챙겨가며, 나온 가출은 어디로 가버리고 억척스럽게 아침거리를 준비하는 여인이 되어 버렸잖은가.

가로등에 비친 그림자가 그늘만 입은 채 고개 숙였다. 내가 가진 색깔은 누구한테 칠해 놓고 무채색으로 앉았단 말인가. 싫다. 다시 돌아가야 하겠지. 오동나무가 오소소 자주 이파리를 뒤집어 귀를 열었다. 그에게 독백이라도 해야 살 것 같다.

갑자기 미어터지도록 울고 싶었어. 가령 여기와 저기 사이에 놓여 있던 희미함이 자꾸 명확해지는 거야. 이를 테면 여인의 자리 때문에 빠져나간 쇄골 도드라진 여자라는 자리가 그립더라. 풋풋하다는 것과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렇다고 아주 여인을 버리고 싶지도 않아. 미처 내가 알지 못했던 매력도 여인이라는 호칭에 숨어 있을 거라고 믿어. 이제 시간이 흐르면 나도 어쩔 수 없는 여편네가 될 거야.’

독백을 접으니 위대한 여자의 변천사가 시작된다. 흰 쌀벌레에 기겁해 달아나는 얇은 여자, 내일 당장 이혼이라도 할 듯 큰소리치고, 비상금 찾아 달아나지도 못하고, 찬거리를 준비하며 자존심도 내팽개친 두꺼운 여인에서 자식과 남편과 나의 무수한 둘레를 넉넉히 감싸 안을 수 있는 오지랍 넓고 질긴 여편네로 말이다. 이건 반전도 위반도 아닌 위대한 사명감이지 않을까.

같은xx 염색체이건만 여자와 여인네와 여편네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