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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매혹 / 김경

매혹 / 김경

 

 

 

5월이다. 겹겹의 꽃잎을 부풀려 올린 장미들이 소란스럽다. 이제는 흔할 대로 흔해진 꽃이라지만 그 자태에 쏟아지는 찬사는 변함이 없다. 꽃의 대명사로 불릴 만큼 전 세계 사람들이 선호한다고 하니 과연 꽃 중의 꽃이다. 비단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나는 철이 채 들기도 전에 장미의 위력을 몸소 체험한 바, 봄이 깊어질라치면 서둘러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기를 즐겨한다.

내가 초등학교 오학년일 때 큰 언니는 시집을 갔다. 건넌 마을에 신접살림을 차리고 형부는 도시로 출퇴근했다. 어느 날 형부가 출장을 떠나자 혼자 자기 무서웠던 언니는 나를 데리러 왔다. 그날 밤, 소꿉장난 같은 신혼 방에서 언니가 만들어 준 저녁밥을 먹고 숙제하다가 잠이 들었다.

두런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건 이튿날 해가 중천에 걸렸을 무렵이었다. 얼굴에는 찬물 몇 바가지를 이미 뒤집어 쓴 뒤였다. 나를 향해 쏟아지는 안도의 목소리보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소스라쳤다. 실눈을 뜨고 바라본 세상은 기이하게도 온통 붉은 빛이었다. 현기증과 함께 전율이 일었다. 비단 연탄가스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늘을 가릴 듯 부지기수로 피어난 붉은 장미 송이들이 마치 박수를 치듯, 멍하니 누워있는 나를 일제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고혹적인 장미를 무더기로 본 건 그때가 처음이다. 오래전 장미나무들이 펼쳐놓은 황홀경은 내가 아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압도했다.

초록의 잎들을 비집고 쏟아져 내리던 티끌 없는 햇살과, 그 햇살아래 붉게 타고 있는 아련한 신기루에 취해 꿈결인 듯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그 순간 나도 모르는 씨앗 하나가 내 속 어딘가에 콕 박혀서 발아할 날을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부득이 그날은 결석을 했는데 걱정 따윈 일어나지 않았다. 친구를 통해 선생님께 전갈을 보냈다는 것이 안심이 되기도 했지만, 차가운 바닥에 누워서 바라본 장미꽃의 향연이 더 이상 어떤 생각을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연탄가스가 아니라 장미향기 때문에 그날 내내 나는 어지러웠을 것이다. 마치 내가 꽃이라도 된 듯 언니의 극진한 간호와 대접을 받으며 몸을 추스르는 데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왔다.

다음 날, 더욱 희한한 일이 일어났다. 책가방을 메고 막 대문을 나서려는데 큰언니가 허겁지겁 들어섰다. 그리고는 신문지로 둘둘 말아 싼 무엇을 내밀었다. 장미였다. 전날의 사고가 못내 미안해서, 꽃을 보며 눈을 떼지 못하던 나를 위해 주인 몰래 새벽같이 몇 가지를 꺾었단다. 그것은 몇 가지가 아니라 품 안에 넘칠 만큼 풍성하고 화려했다. 개울을 건너 숨이 차게 뛰어 왔을 장미다발 속으로 내 영혼이 걸어 들어갔다.

그즈음엔 읍내에 사는 부잣집 친구나, 치맛바람 꽤나 날리는 엄마들이 교실의 꽃병에 꽃을 채우고는 했다. 그 선망의 꽃들은 어린 마음을 애태웠다. 동네만 벗어나면 눈밭이 펼쳐지고 산이 지척인 시골마을에서 그만한 꽃을 들고 갈 수 있는 아이는 없었다.

손수 무언가를 들고 학교로 가는 일이 내게도 일어나다니, 더구나 시골집 마당에는 없는 이 아름다운 장미라니! 장미를 품은 채로 나는 날고 있었다. 학교 가는 길이 멀고도 멀었으면 싶었다. 그것은 꽃이 아니라 가까스로 찾아낸 자존감이며 달라진 위상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러했다.

보무도 당당히 교실로 들어섰다. 내 주위로, 아니 장미꽃 주위로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연탄가스를 마시고도 멀쩡히 살아 돌아온 친구에게 대한 반가움, 한 다발의 검붉은 장미를 향한 부러움, 이런 것들이 뒤섞여 교실은 삽시간에 생기가 넘쳤다. 결석의 만회는 물론 선생님의 칭찬까지 받고 보니 전날의 사고가 고맙기까지 했다.

장미는 여러 날 꽃불을 밝혀주었다. 비록 언니가 주인 몰래 꺾었다지만 하마터면 나를 저 세상으로 보낼 뻔 했던 허술한 방을 놓고 볼 때, 미안함은커녕 이만한 행복쯤 누릴 권리가 있다고 속으로 우쭐대는 나날들이었다.

훗날, 우리 집 남쪽 마당 한 귀퉁이를 벽돌로 쌓아 내 손으로 꽃밭을 일구었던 것은 그 붉은 세상에 매료된 순간부터 끊임없이 돋아나던 장미에의 환상 때문이었다. 늘 바쁘기만 한 엄마를 설득할 방법도 없었거니와, 온갖 농사꺼리로 어지러운 마당을 사치스레 가꿀 염치는 더욱 없었으며, 무엇보다 그때는 내가 어렸기 때문에 소박한 꿈은 늘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던 여고시절의 어느 오후, 문득 지나치면서 본 장미 묘목에 발길이 붙잡힌 건 우연이 아니었다. 교복차림으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몇 그루의 장미나무를 안고 온 날은, 어린 가슴을 세차게 흔들었던 지난날의 장미꽃들이 밤새 피어나고, 피어나고 또 피어났다.

이듬해 봄, 겨우 몇 송이였지만 수줍게 피어난 꽃들과 인사를 하게 되었으니 드디어 숙제를 끝낸 듯 속이 후련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장미들은 꽃밭이 비좁다는 듯 무리지어 춤을 추었고 시골마당을 뽐내는 절대 강자로 군림했다. 찬란한 기쁨과 함께. 해마다 몸피를 늘리던 장미나무는 내가 결혼해서 집을 떠나올 때까지 튼실하고 탐스러운 꽃송이들을 요술처럼 피워냈다. 화단을 지나칠 때마다 알지 못할 감정이 뭉글뭉글 솟아올랐다. 그것은 언제까지나 내 안에 살아있을 아름다운 동화였다. 동네가 재개발 되어 아파트 단지로 변한다고 했을 때, 그 꽃밭만이 서럽고 안타깝고 또 미안했다.

언젠가는 마당이 있는 집을 장만해 또 다시 장미꽃밭을 일구어 보고 싶다. 마당 한가운데 정원을 만들고 색색의 장미나무를 심어 오월 이맘때쯤, 꽃들이 일제히 손을 잡고 일어서면 그 아래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싶다. 그때도 장미는 쏟아지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세상에 다시없을 신기루를, 알지 못할 삶에의 환상을 선물할 것인가.

모르긴 해도 내 지나온 삶의 마디마디엔 또 다른 매혹의 순간들이 숨어있었을 것이다. 그 열렬한 기쁨으로 모나고 부족한 것들을 덮으며 인생이라는 긴 여행길을 걸어왔을 것이다. 추억이 물결치는 장미의 계절, 붉고 노랗고 하얀 꽃들을 등불삼아 내 유년의 뜰에 하염없이 머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