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서비스 / 김해자
바야흐로 풀 서비스 시대가 도래했다. 애프터서비스는 워낙에 오래전부터 이루어진 일로 구시대적인 단어쯤으로 여겨진다. 영화를 보고 식사를 하고 여가의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쇼핑몰의 원스톱 서비스 또한, 이천 년대 초의 핫이슈였지만 지금은 거의 보편화 되어 새롭지는 않다. 이제는 물건을 살 때부터 평생 관리를 해주는 풀 서비스쯤 되어야 고개를 갸웃해 보게 되는 이른바 고객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생경할 수도 있겠지만, 이십 년을 넘게 함께 사는 우리 부부도 풀 서비스가 필요할 때가 있다. 의견 차이로 감정의 대립이 며칠 이어진다거나, 무료한 생활이 점점 병이 들고 있을 때 한쪽에서 풀 서비스를 제안한다. 어떤 일로 잘못을 했다고 생각하는 쪽에서 먼저 손을 내미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풀 서비스란 처음부터 끝까지 서비스를 해주는 경우를 말한다. 서비스를 받는 쪽은 고객이고, 고객은 곧 왕이 된다. 원하는 대로 서비스를 해줘야 하는 쪽은 물건을 팔아야 하는 사람이겠지만 우리 부부는 그날 좀 더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쪽이 대상이 된다. 연인이나 부부 관계에선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늘 약자라는 원리이다. 그러나 이미 이십 년이나 더 살을 썩으며 산 부부가 무슨 감정이 더 있고 덜 있고 하겠는가. 필요 때문에 행해지는 것이 다반사다. 내가 갖고 싶은 물건이 있는데 남편의 허락을 받아야 할 때, 시댁을 가기 전날 남편이 내 비위를 맞추어 주기 위해 제안하는 식이다.
말은 상대를 자극하기 위한 최고의 무기다. 말은 칼이 되기도 하고 총이 되기도 하여 보이지 않는 피를 흘리게도 하지만, 반대로 모든 벽을 허물어 버리게 하는 힘도 있다. 상대의 섹시함을 말로 운을 띄우면서 시작한다. 몰랐던 것을 처음 발견했다는 듯 하얀 거짓말도 상관없다. 칭찬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당신을 내 사람으로 만든 내 최고의 선택이라는 말을 해주면 거의 허물어진다. 허물어진 상대를 은근하고 축축한 눈길로 무장해제 시킨다. 서비스 받을 준비가 된 것이다.
진홍색 와인을 잔에 따르고 상대의 검은 눈동자에 들어있는 내 눈을 들여다본다. 이미 몸을 섞고 있음을 느낀다. 눈동자 속에 내가, 땡그랑 소리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와인을 혀로 굴린다. 떫고 시큼한 맛이 혀와 입천장에 까끌하게 머물다 목젖을 타고 흐른다. 끈적거리는 음악과 진한 핏빛 와인은 귀와 눈을 자극한다. 이제 은밀한 행동이 필요하다.
텔레비전에서 음악프로를 보면 눈을 감고 감상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눈을 감으면 전해지는 감동이 더한 탓일까. 부르는 사람의 목소리나 감정을 더 세심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눈을 뜨면 많은 신경을 다른 곳에 뺏기기 때문에 눈을 감는 것이리라. 때로는 지겨운 마누라를 보기 싫을 때도 있지 않을까. 눈을 감으면 몸을 더 잘 느끼고 상상의 즐거움도 클 것 같다. 서비스 목록에 올리자, 준비물로 안대나 손수건 정도는 준비해 둘 것,
먹는 것에도 몸이 원하는 것과 뇌가 원하는 것이 있다.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만드는 것은 몸이 원하는 음식이고, 반면 예쁘고 자극적인 것은 뇌가 원하는 것이다. 풀 서비스에서는 이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 근육을 이완시키기 위해 머리에서 발끝까지, 강하면서 부드럽게, 세포 하나도 소중하게, 세심하면서 날카롭게 몸이 원하는 만큼 터치해 준다. 나른해진 몸이 채워지지 못한 욕망으로 뇌가 움직인다. 왕을 대하듯 했던 모든 행동을 거둔다. 거칠게 대하며 뇌쇄적 자태로 태우면 풀 서비스 중반에 접어든 것이다.
이쯤 되면 서비스를 받는 것이 따분해진다. 물건을 산 뒤, 고장이 나 몇 번 서비스 받다 보면 자신도 고칠 수 있지 않을까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관찰하게 되고 고쳐보려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하면 억지일까. 상대에게 몸을 맡겨두기보다 자신도 뭔가가 하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미흡한 터치 탓에 자신이 손수 보여주고 싶은 부분이기도 하고, 멋쩍었던 생각들이 상대의 노골적인 행동에 자신을 얻은 까닭이기도 하다.
이제 서로 서비스를 주고받게 된다. 마주 보기도 하고 같은 곳을 보기도 하며 눈을 감기도 하고 뜨기도 한다. 손을 잡기도 하고 손을 놓기도 하며 뇌가 시키는 대로 하다가 몸이 원하는 것을 하기도 한다. 주는 서비스도 받는 서비스도 결국은 모두 쾌감으로 이어진다.
풀 서비스란 고객도 기업도 최상의 만족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하여 풀 서비스가 갑과 을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 따분하고 지루한 부부 생활에도 꼭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녹슨 자건거 바퀴에 기름칠을 해 주면 부드럽게 굴러가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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