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리 / 조이섭
인생이란 평생 그물 하나 엮어가는 것이다. 제각기 타고난 그릇과 분수에 맞는 그물을 만든다. 그물코를 드문드문 뜨는 이가 있고 촘촘하게 짜는 이도 있다. 그것으로 고기를 잡고, 명예와 보람을 가두다가 이윽고 그물을 내려놓고 본향으로 돌아간다.
그물에는 벼리가 있어야 한다. 벼리란 그물의 위쪽 코를 꿰어 놓은 줄을 일컫는데, 이것을 잡아당기거나 놓아 그물을 오므렸다 폈다 한다. 아무리 그물코가 촘촘해도 벼리로 잘 모아주지 않으면 고기를 잡을 수 없다. 그래서 일이나 글에서 뼈대가 되는 줄거리를 벼리라고도 한다. 나는 벼리도 없이 그물코만 촘촘하게 얽어 고기를 잡으려다 낭패를 보았다.
같은 아파트에 살던 대여섯 가족과 모임을 하게 되었다. 그중에 고위 공무원인 고등학교 동문도 있었다. 그 집에는 아들과 딸을 하나씩 두었는데도 남자애를 입양해서 키웠다. 근면하고 성실한 데다 이웃의 어두운 구석까지 살피고 쓰다듬을 줄 아는 내외라고 믿었다.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사이 사는 곳이 모두 흩어지자, 모임에 참석하는 동문 내외의 발걸음이 시나브로 뜸해지더니 자취를 감추었다.
소식이 끊어졌던 동문 부인이 급히 쓸데가 있다면서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아는 안면에 박절하게 대할 수가 없어 약간의 돈을 보냈더니 원금과 함께 높은 이자를 쳐서 돌려주었다.
그다음부터 잊을만하면 다문다문 빌려 가서는 이자를 꼬박꼬박 갚았다. 이렇게 이자를 받아 모으면, 금방 부자가 될 것 같았다. 빌려가는 액수가 커지고 상환하는 기간도 점점 길어졌다. 불안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외로 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가 우리 부부를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아파트 방 하나와 거실에 컴퓨터가 여남은 대나 설치되어 있었다. 미국, 일본, 홍콩 증시현황과 국내 증권사의 주가 변동 그래프 화면 여러 개가 켜져 있는 모양만 봐서는 마치 증권회사 매장 같았다.
그녀는 자기들이 개발한 증시 예측 시스템을 설명하고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전문가와의 친분을 내세우며 자랑했다. 증시라는 게 알고 보면 땅 짚고 헤엄치기보다 쉬우며 절대로 손해 볼 일이 없다고 게거품을 물었다. 그때라도 충혈된 눈동자를 꿰뚫어 보고 붉은 광기를 간파했어야 했다. 결국, 편안한 노후를 책임지겠다는 사탕발림에 넘어가 우리 부부는 수중에 있던 돈을 모두 건네고 말았다.
며칠 후 동문 내외가 종적을 감추었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가 보니, 나처럼 당한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같은 아파트 주민, 공직생활 동료, 후배 직원 할 것 없이 수십 명이었다. 말로만 듣던 사금융 사기를 당한 것이었다. 강물에서 노니는 물고기를 거저 건지려다 오히려 내가 그물코에 걸린 꼴이었다. 마음 한가운데 제대로 된 벼리 하나 새기지 못하고 살아온 데 대한 벌이었다.
누구나 마음속에 벼리 하나씩 품고 살아간다. 마음에 간직한 벼리는 긍지, 자존감과 같은 것으로 이른바 좌우명이라 할 수 있다. 자공子貢이 스승인 공자에게 좌우명을 하나 지어달라고 부탁드렸다. 공자는 '서恕'라고 대답했다. 퇴계 이황은 그것을 경敬이라고 했고, 남명 조식은 의義라고 했다. 특히, 남명은 성성자惺惺子라고 부르는 쇠방울을 옷에 매고 다니면서, 방울 소리가 날 때마다 자신을 성찰하여 늘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고자 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그물코를 다시 깁기 시작한다. 구멍이 숭숭한 그물코를 하나하나 찾아내어 찢어진 자국을 지우고 흔적을 메꾸고 있다. 익지도 않은 과일을 손에 들고 겅중겅중 깨춤을 추었던 나의 가벼움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짓기도 한다. 어디 그뿐이랴, 투망한답시고 주위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다. 아무리 강에 고기가 많아도 그물에 들어와야 내 것이 된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그물만 던져놓고 헛되이 보낸 시간이 얼마인지 다 헤아리지도 못한다.
또다시 실패하면 손볼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이번에는 욕심과 어리석음, 성냄을 내려놓고 벼리를 제대로 갖춘 그물을 만들고 싶다. 그물 끄트머리에 남명선생의 소리 나는 쇠방울을 매달아 그물질할 때마다 자신을 돌이켜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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