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탓이다 / 김희자
서설이었다. 아침부터 시커먼 하늘이 낮게 내려앉더니 눈이 펑펑 쏟아졌다. 백색의 눈발은 혼곤히 잠든 그리움을 흔들었다. 첫눈이라는 의미만으로도 심장은 마구 뛰었다. 이런 날에는 위험한 도전장을 던지고 싶어진다. 은밀한 소행이라도 저지르고 싶은 엽기적 충동이 일렁인다.
초설(初雪)이 내리는 날에는 꼭 연인 사이가 아니더라도 밀어는 오고 간다. 즐겨 찾는 동인 카페에 갔더니 H 선생님이 ‘안동역에 가실 분?’ 하며 글 한 줄을 남겨두었다. 점잖기로 소문난 H 선생님도 서설의 운치에 가만있지를 못한 모양이었다. 노랫말을 빌려 우스갯소리를 툭 던져놓았다. 첫눈이 내리는 날, 안동역에 가면 정말 이야기가 만들어질까? H 선생님은 안동역을 떠올렸지만 나는 샤갈의 눈 내린 마을이 생각난다.
시인 김춘수는 샤갈의 마을에 ‘수천수만의 날개를 달고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고 그랬다. 하얀 그리움이 너울거리는 풍경, 순백색의 세계를 떠올리니 기분이 묘해졌다. 낮부터 술 생각이 났다. 술을 즐기거나 술친구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심기가 허해지면 한두 잔은 기분 좋게 들이킬 수 있다. 마침 문학회에서 저녁을 산다고 했던 날이니 절로 건수가 생겼다. 밤까지 눈이 이어질까 걱정은 앞섰지만 들뜬 기분을 죽일 순 없었다. 술을 마실 기회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흥분이 되었다.
밤 외출은 꺼리지만, 휘휘 날리는 눈발을 맞으며 시내로 나갔다 모임 장소는 삼삼구이 횟집이라고 했다. 술자리에 앉을 기회가 적은 나에게는 낮선 이름이었지만 가끔 지나치는 골목이라 간판은 금세 눈에 띄었다. 초저녁인데도 빈자리는 없었다. 목을 길게 빼고 안면이 있는 사람들을 찾았다. 힐끔힐끔 쳐다보는 남자들의 눈을 피하며 예약된 자리를 물었다.
하얀 두건을 쓴 여인이 홀 뒤쪽을 가리켰다. 구석진 곳으로 들어갔지만, 화장실만 떡하니 서 있고 술좌석은 보이지 않았다. 까치발을 하고 기웃거렸더니 자그마한 문짝이 눈에 들어왔다. 방문 앞에는 신발 두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옳거니 하며 문고리를 잡았다가 슬그머니 놓았다. 단체 손님을 받기에는 작은 방 같아서 물러섰다. 하지만 또 다른 방은 보이지 않았다. 똑똑 노크를 하자 안에서 기척이 났다.
그 방은 벽장처럼 숨겨진 방이었다. 탁자 두 개가 겨우 머리를 맞대고 있는 작은 방이었다. 천장은 낮고 공간도 좁았다. 방에 들어서려면 우선 머리부터 낮추어야 했다. 방문을 통과하는 사람마다 “이런 데도 방이 다 있네!” 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남과 여, 단둘이 드는 은밀한 공간은 아니지만 야릇한 기분이 든다며 두리번거렸다.
한해의 끝자락에서 그저 노고의 술잔을 건네는 만찬의 자리였다. 비밀스러운 얘기를 나눌 것도 없는데 은밀한 방을 잡았다며 박장대소했다. 싱싱한 회에 입이 모처럼 호강을 하고 정이 넘치는 술잔이 몇 순배 돌았다. 노란 조껍데기 술이 분위기를 돋우자 진지한 여느 때와는 달리 시종 화기애애했다.
사교술이 몸에 밴 신사들의 얼굴이 붉어지며 점점 친밀해졌다. 열린 장소에서는 감히 나눌 수 없는 사담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모임의 발전을 위한 이야기가 오가고 연애담도 흘러나왔다. 다디단 술이 휘청거리며 몇 벙 더 들어왔다. 센티멘탈해진 기분에 원초적인 이야기까지 술술 나왔다. 점잖은 사람들이 자기 자랑을 늘어놓고 숨기고 있던 이야기들을 발설하기 시작했다.
점잖은 회장님도 불그레한 얼굴로 좀체 열지 않은 입을 열었다. 누구누구는 스캔들 때문에 소중한 직장까지 잃었으니 조심들 해야 한다. “위험한 짓은 아예 시작도 하지 마라.”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Y 선생님은 “나, 동안으로 보이지 않나요?” 하며 넉살 좋게 웃었다. 꿈의 클리닉에서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수년 동안 특별 관리를 받고 있다고 실토했다. 하도 동안(童顔)이라 후배에게 아우 취급을 당했다며 은근슬쩍 자랑도 했다. 수수하기로 소문난 J 선생님은 한 달 전에 점을 뺐다며 우윳빛 낯을 내밀었다. 분위기가 고조되자 그들의 틈에 낀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입술을 달싹달싹 속살거리다가 지난 사랑 이야기를 남의 일처럼 꺼내버렸다.
애초부터 그 방은 은밀한 방이 아니었다. 허물없이 정담을 나누다 보니 밀담을 나누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누구의 허물, 입장도 다 이해할 수 있는 방이었다. 머릴 옹기종기 맞대고 야한 이야기를 해도 주워 담을 사람도 없었다. 그곳을 빠져나오는 순간 입을 꼭 봉하면 될 일이다. 은밀한 방이라고 해서 야릇한 일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허심탄회하게 말을 트고 호탕하게 웃을 수 있으면 좋은 장소로 그만인 것이다.
밤새워 야화를 들먹여도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동짓달 밤이 왜 이렇게 짧으냐?”며 아쉬움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두 거기서 거기. 농익은 이야기가 오간들 무슨 대수란 말인가. 벽장 같은 그 방은 그런 사람들이 만나는 장소였으면 좋을 것 같았다.
밖은 어둠의 장막 속에 갇혀있었다. 기분을 고조시켰던 눈은 어느새 그치고 밤하늘엔 별들이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수고와 험한 풍경들을 공평하게 덮어 버리는 흰 눈. 첫 눈은 사람들을 설레게 하는 매력을 지녔다. 온 세상을 덮을 만큼 펑펑 내린 눈은 아니었지만 나주 특별한 이야기 하나가 만들어졌다. 마음도 잠시 마실을 갔다 온 것처럼 말개져 있었다. 밤이 이슥해져 귀가를 서둘렀다. 지하철에 앉아 나는 백치가 되었다. 오늘 기분이 괜스레 들뜨고 구석진 방에서 은밀한 이야기가 오간 것은 순전히 ‘첫눈 탓이다!’ 하며 소리 없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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