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정길 / 조이섭
한식을 맞아 아들 내외와 성묫길에 나섰다. 산소는 지릿재 마루에서 합천 쪽으로 두어 모롱이를 돌아들어 오른쪽 언덕바지에 있다. 고갯길로 들어서자 왼쪽 산비탈에서 자란 잡목 가지들이 길 쪽으로 침범을 하고 있었다.
길 양쪽 바닥의 가장자리에서는 잡풀이 앞장서고 뒤이어 관목들이 흔들거리며 고개를 디밀었다. 움푹 파여 허연 생채기를 드러낸 아스팔트는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고갯길 군데군데 칡즙이나 막걸리를 팔던 좌판들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릿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진주와 사천에서 대구로 통하는 길목이어서 차들의 내왕이 아주 많았다. 특히 5공화국 때에는, 근처에 대통령 부모의 묘소가 있어서 도로변의 자투리땅에도 배롱나무를 비롯한 온갖 화초로 오밀조밀하게 가꾸어 놓았었다. 최근에 고개 아래에 터널이 생기는 바람에 지릿재를 오가는 차가 거의 사라지자 묵정길로 변하는 중이었다.
고개를 다 넘을 때까지 오가는 자동차 한 대 보이지 않아 외로움을 타고 있었다. 길도 다니지 않으면 묵정길이 되듯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쉼 없이 교류하고 소통해야 한다. 말하지 않아도 내 맘 같거니 태무심하다가는 소원해지고 결국은 남남이 되어버린다.
며칠 전, 첫 직장에서 만났던 한 해 선배를 잃었다. 방광암 진단을 받고 서둘러 수술을 하였으나 암세포가 몸 전체로 전이되어 버렸다고 했다. 장례식장에서 형수를 만났다. 그런데 남편을 여읜 슬픈 표정이 아니었다. 상주인 아들과 딸도 마찬가지였다.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아픔보다 홀가분한 가벼움만 읽혔다.
문상객들이 뜸해지자 형수가 와서 넋두리를 했다. 학벌이나 인물이 빠지지 않는 두 자녀가 서른 중반이 넘도록 죽으라고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했단다. 아들은 아버지 같은 아버지가 되기 싫고, 딸은 아버지 같은 남편을 만날까 봐 두려워 그렇다는 것이었다.
선배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독선적이고 권위적이었다고 했다. 사춘기 아이들은 엄하기만 한 아버지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때부터 가족끼리 데면데면 대화가 없어지고 선배는 투명인간, 그림자가 되었다. 아이들은 자기만의 누에고치를 만들어 그 속으로 숨어버렸다. 결국 아들은 직장을 잡은 후 따로 나가게 되었고 딸마저 도피성 유학길에 올랐다. 형수도 직장생활을 핑계로 밖으로만 맴돌았다.
선배는 바깥에서는 매사에 빈틈없고 배려심이 많았으나, 집안에서는 사방이 꽉 막힌 벽에 갇혀 살아왔다니 참으로 놀라웠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함께 먹으면서도 없는 듯이 남남처럼 살았던 그 긴 시간 동안 얼마나 숨이 막혔을까. 가족들의 마음고생은 또 얼마나 깊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 왔다.
관계를 맺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아름답게 키워나가는 것은 더욱더 어렵다. 부부와 자식이라는 귀한 관계에 잡풀만 무성해 버렸다. 황폐해진 묵정길에 쌓인 아픔은 큰 병이 되었고, 급기야 요즘처럼 발달한 의술도 어쩌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문경 새재에 ‘옛날 과거길’이라고 표시해 둔 샛길이 있다. 예전에 보았을 때는 길이라고 할 수도 없었던 묵정길을 말끔하게 보수해 놓았다. 많은 사람이 넓은 포장도로를 두고 선비의 과것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끊어졌던 길도 얼마든지 다시 이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평소에 지인들에게 안부 전화를 잘 하지 않는 편이다. 입에 발린 소리 같고 성의가 없어 보여서다. 그보다는 얼굴을 마주 보고 식사나 술자리를 하면서 소통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친구가 자꾸 줄어들고 교제의 폭도 좁아지고 있다. 친구를 새로 만들기도 어렵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고 마냥 믿고 뭉갤 일이 아니다. 마음으로 길을 넓히고 발로는 부지런히 그 길을 왕래해야겠다.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죽마고우에게 문자를 보냈더니 대답이 없다. 또 하나의 묵정길을 만들까 두렵다. 오늘은 어떻게든 연락이 닿아 잔치국수라도 함께 말아 먹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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