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닦이 / 김정화
앙다문 입매가 찔레꽃 열매처럼 야무지다. 곱게 빗어 넘긴 쪽머리의 금색 큰비녀가 그믐달 여린 빛 아래서 번득인다. 흰색 저고리에 덧입혀진 색동 쾌자가 위엄 있고, 홍치마 아래 살짝 보이는 하얀 버선발이 초승달처럼 시리도록 곱다. 손에 든 쥘 부채의 세 송이 모란이 계절을 건너뛴 채 찬바람에도 붉은 꽃잎으로 넘실댄다.
굿판이 시작된다. 불꽃을 머금은 흰 종이 한 장이 밤하늘에 잠시 꽃씨를 뿌렸다가 잿빛 꽃가루로 굿청에 떨어진다. 부정을 씻어 내고 복을 불러들이는 장면이 눈길을 잡아맨다. 무녀가 제관을 굿상 앞에 엎드리게 하고 젓대로 등을 때려 혈을 내린다. 통증을 함께 느끼는 듯 미간을 좁히는 사람들은 저마다 고통의 응어리를 품고 살아왔기 때문일까.
굿당은 소리의 우물이다. 두레박줄을 풀어내듯 입타령으로 술술 푸는 무가사설의 구성진 여음에 굴곡미가 흐른다. 북, 피리, 해금 등 삼현육각이 한바탕 어울림 소리를 내니 무녀의 공수가 애절한 넋노래로 바뀐다.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구경꾼들의 감탄과 한숨이 구석에서 터져 나온다. 부드러우면서도 끈끈하고 선세하면서 처절한 시나위가 수로왕릉 주위를 감싸 안는다. 징과 장구가 땅과 하늘을 울릴 즈음 굿청은 작은 우주가 된다. 풍어를 기원하는 남해안별신 굿판이 옛 가락국 굿마당으로 옮겨왔다.
부채를 편 손이 허공에 빗금을 긋는다. 선왕굿 장단에 발디딤 새를 옮기며 천천히 맴돌이를 하는 무녀의 버선발을 따라 사람들의 시선이 움직인다. 나도 모르게 무녀의 몸놀이에 빠져든다. 가슴에서 서서히 바람개비가 도는 듯하더니 회오리바람으로 요동치며 마음을 헤집는다. 이유도 모른 채 가슴은 소나기를 머금은 먹구름이 되어 한바탕 울음이라도 쏟아내고픈 심정이다.
어릴 때 이웃 담장 아래 숨어서 마을굿을 지켜본 일이 떠오른다. 진한 화장에 붉은 모자를 쓰고 방울을 흔들던 중년의 무당 얼굴은 무섭고도 위엄 있었지만 때로는 처연하도록 가슴이 오므라들었다. 한창 굿의 신명이 올랐을 때 무당은 구경하던 젊은 여인에게 신복을 입히고 춤을 추게 하였다. 머뭇거리던 여인은 느린 평걸음으로 북장단에 발을 맞추더니 점점 빠른 몸짓으로 휘돌아지다가 이윽고 바닥에 주저앉아 일장통곡을 하였다. 이제 와서 생각해도 그 서러운 울음의 속사정을 짐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일렁이는 바람에 촛불이 무녀복을 스치며 달빛 소리를 낸다. 무엇이 그녀를 무녀의 길로 가게 하였을까. 마주친 눈빛이 섬뜩하다. 흐르는 피를 바꿀 수 없는 세습무의 혈통을 이어받았거나 무병에 걸려 어쩔 수 없이 신을 가까이 한 운명을 차라리 감싸 안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삶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인간의 편이 되고자 신에게 고개 숙이는 비손의 몸짓이 애달프다.
무녀의 눈동자에 강물이 일렁인다. 촛불이 어둠을 밀어내는 신방에서 신과의 사랑을 시작한다. 정성껏 차린 상 앞에서 지아비인 신을 위해 예를 갖춰 술을 따른다. 밤새워 만든 꽃으로 신방을 꾸미고 함께 노래하며 춤을 춘다. 지상에서 이룰 수 없는 슬픔을 한 맺힌 곡조로 대신한다. 넋대를 잡은 무녀의 손이 떨리더니 몸에 신이 내려앉는다. 북채를 잡은 악사의 손놀림이 빨라지고 신열 들린 치맛자락이 굿청의 파열음을 따라 빙그르르 돈다. 은밀한 소곤거림이 공수되어 에돌아가기에 아무리 귀 기울여도 알 수 없다. 쥘 부채로 가려진 사랑의 입맞춤이 구경꾼들의 눈길을 능숙하게 따돌린다. 한바탕의 춤사위가 끝나자 고요한 달빛만 비친다. 영적 세계는 하나가 되었지만 신은 매정하게 떠나고 말았다.
큰머리를 얹고 검은 띠를 두른 무녀의 모습이 낯익다. 민화에 자주 등장하는 오구대왕의 일곱 번째 바리데기 공주와 흡사하다. 그녀는 부왕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훗날 아귀병에 걸린 아버지를 죽음에서 구한 후에 무속신이 되어 천상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바리공주의 이야기는 무녀에 의해 구송되고 무녀는 다시 바리 공부로 환생하는가 싶다. 그들의 삶은 흔들리는 촛불 같지만 다른 이의 삶을 위해서 자신을 태우는 숙명을 스스로 감내한다.
길닦이가 펼쳐진다. 길닦이는 굿의 끝판으로 망자의 넋을 위로하여 저승으로 인도하고 살아있는 자의 흐린 영혼을 씻어주는 의식이다. 무녀는 넋을 넣은 놋주발을 저승길인 양 길게 이은 무명천 질베 위에 천천히 무지른다. 산자의 노래가 소릿길을 타고 흰 천은 혼의 길이 되어 한 많은 세월을 따라 흐른다. 신의 결정을 인간에게 전해주는 무녀의 역할은 몰아의 경지에 빠져야 제대로 이루어진다는데 그녀는 죽음의 상태까지 가서 정령과 만난 것이 틀림없다.
대상과 만나는 순간이 신들림이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그렇게 만나야 하는 법. 글도 마찬가지라 하겠다. 무녀가 대를 잡는 마음으로 열정의 끈을 부여잡고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이른다면 문학의 신과 만날까. 글무덤 속에 들어가 온몸이 삭아 내리면 무녀의 넋집 같은 글을 보듬어 올릴 수 있을까. 마음고름을 푸는 길닦이로 한 줄이나마 쓸 수 있으면 좋겠다.
느린 손짓이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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