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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이발소에서 / 정희성

이발소에서 / 정희성


 

 

이발소보다 더 편안한 곳은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나의 애마인 자전거는 두 달에 한 번쯤 그곳에 가자고 보챈다. 내가 미장원에 출입하는 것을 마뜩찮게 여기더니, 몇 해 전부터는 고삐를 그쪽으로 당겨도 못 들은 척 시치미를 뚝 뗀다. 하긴 그즈음 나도 미장원에 가는 게 싫어졌다. 내 나이에 걸맞지 않은 곳일 뿐더러, 젊은 미용사의 옷자락이 팔에 스치는 것도 신경이 쓰이고, 공기도 떠도는 화장품 냄새도 역겨웠다.

이발소에는 나른하게 취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이스트로 잘 발효된 술빵처럼 약간 시큼한 냄새가 떠돈다. 땀에 젖은 산모의 젖무덤에서 나는 냄새와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그곳에 들어서면 모든 긴장이 일시에 풀려버린다. 면도를 해주는 나이든 여인도 시선을 잡아끄는 일도 없고, 설혹 그녀의 옷자락이 팔에 스친다고 할지라도 예민하게 굴 필요도 없다.

보통 아침나절 10시경에 이발하는 터라 내 뒤에 오는 손님이 많다. 그들은 으레 대기하면서 소파 앞 탁자 위에 놓인 신문을 뒤적인다. 티비에서 끊임없이 뉴스가 흘러나오는데, 어떤 이는 듣다가 이따금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고 거칠게 신문을 넘긴다. 탈도 많고 말썽도 많은 정치가 성에 차지 않아, 자신이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고픈, 나름의 확고한 견해와 의견이 있다는 태도다. 이발사 아저씨는 또 어떤가. 세상만사 모든 일에 관여하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주워섬긴다. 다행히 아저씨는 천성적으로 온건파다. 그래서 극단적인 진보주의자나 보수주의자인 손님이 나타나도 격앙된 언쟁에까지 이르는 법이 없다. 언제든지 그럼요또는 당연히 그래야지요.” 하고 맞장구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사실 아저씨가 지껄이는 말에는 손님에 대한 무관심이 짙게 깔려 있다. 손님의 기쁨이나 고통 또는 슬픔에 전혀 흥미가 없을 뿐더러, 어떤 주제를 놓고 이야기 한다고 할지라도 설득하거나 충고할 의사가 전혀 없다. 그런 무관심이 외려 손님들을 편안하게 하고 그곳을 친밀한 공간으로 변모시킨다.

아저씨는 내가 미리 알려주지 않아도 귀가 드러나게 뒷머리를 짧게 친다. 그러고 보면 나도 이곳 단골인 모양이다. 고맙게도 특별히 나의 취향까지 감안해준다. 어떻게 내가 추억을 끌어안고 살면서, 힘들 때면 그것을 반추하며 삶의 위안으로 삼는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마무리 손질을 할 때면 옥수수 전분 가루가 담긴 플라스틱 통을 가져와, 그 안에 든 호빵보다 더 큰 분첩으로 분말을 묻혀 내 머리에 바른다. 그렇게 하면 가위질 자국이 선명하게 그러나 다듬기가 한결 쉽단다. 그러니까 나를 80년대 의자에 앉혀 놓고 마음대로 요리하겠다는 심산이다. 아저씨의 이런 의뭉스러운 배려가 나는 무척 마음에 든다.

전분 가루를 바르고 나면 곧 귓전과 귓등에 맑은 금속성 잔 가위질 소리가 어지럽게 울려 퍼진다. 거기에 아저씨가 허공에 사심 없이 풀어놓는 이야기가 대위 선율로 깔리기 마련이다. 지난번에는 뜬금없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조만간 이발소를 닫아야겠어요. 애들도 다 컸으니 이제 쉴 때가 된 것 같아요. 차를 개조해서 그 안에 이발소를 차려놓고 집사람이랑 전국 방방곡곡 여행이나 다닐까 해요. 평생 살면서 고생만 했거든요. 여행 경비는 농촌에 들러 노인네들 머리를 싸게 깎아주고 마련하려고요. 어때요. 계획이 괜찮은가요?”

몸을 한쪽으로 살짝 기울여 내 귀 쪽에 대고 말했지만, 어떤 고상한 의견을 구하는 것이 아님을 느낌으로 알았다. 이미 그럴 맘을 먹고 묻는 것일 테니까.

고개만 끄덕여도 될 성싶었지만 큰소리로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런 삶의 절창에 어찌 추임새를 넣지 않고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그러고 보면 나는 온건파라기보다 눈물이 헤픈 순정파에 가깝다.

이발이 끝나고 나면 언제나 기분이 상쾌하다. 짧게 자른 머리 주변과 귓불에 가볍게 바람이 스칠 때마다 산뜻한 기분이 든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절로 휘파람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