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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일진 / 박경대

일진 / 박경대



 

문을 막 나서자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고 있었다. 현관에서 거울만 보지 않았더라면 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옆문을 열면 비상계단이 있지만 마음을 접었다. 얼마 전에 엘리베이터를 놓치는 바람에 뱅글뱅글 돌아가는 계단으로 내려갔다가 어지러워 혼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는 한참 뒤에 올라오더니 나를 통과하여 계속 올라갔다. 끝 층임을 알리는 번호 등이 켜지자 한숨이 나왔다. 내려오는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층마다 정지하였다가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짜증을 가라앉혔다. 엘리베이터 안은 복잡하였다. 비집고서라도 탈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주차장에는 대형 승용차 한 대가 나의 차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브레이크가 내려져있는 것을 보니 밀어놓고 나가라는 것 같았다. 덩치가 큰 차라서 조금 밀었는데도 힘이 쭉 빠졌다. 아침운동을 했다고 생각하며 차를 타려고보니 옆 차량이 바싹 붙어있었다. 몸을 이리저리 비틀면서 간신히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때 아 오늘이 혹시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언제부터인가 두어 달에 한 번 정도는 어김없이 아침부터 일이 꼬이는 날이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거라는 말을 반복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아파트 정문을 나가려는데 유치원버스가 정차하고 있었다. 운전기사는 내가 나가는 것을 못 보았는지, 금방 출발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내 앞길을 막고 아이들을 태우고 있었다. 서너 걸음만 앞에서 아이들을 태운다면 지나갈 수 있는 상태였다.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이 나왔다. 승차중인 아이들 사이로 안면이 있는 입주민이 보여 경음기를 울리기도 망설여졌다.

답답한 시간이 흐른 뒤 아이들은 탔으나 버스는 움직이질 않았다. 고개를 빼내어 무슨 일인가 보니 아이 엄마와 교사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자 참을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경음기를 누르기 시작했다. 길게 이어지는 소리에 차가 기다리는 것을 깨달았는지 교사는 나를 향해 고개를 꾸벅하고는 버스를 출발시켰다. 경음기 소리는 꽉 막혀있던 가슴까지 시원하게 뚫어주었다.

쌩쌩 달리리라 생각하며 대로로 나섰으나 횡단보도 앞에서 초보운전자가 슬그머니 끼어들더니 서행을 시작했다. 이런 현상을 머피의 법칙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하루가 걱정되었지만 차분해지자고 마음먹었다. 초보차량을 추월하여 막 속도를 올리려는 찰나 신호등이 내 앞에서 끊어지고 말았다. 급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옆에 놓아둔 노트북이 바닥으로 떨어져 뒹굴었다. 꼬이는 날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출근길에 벌어진 황당한 몇 가지 일을 잊어버리려고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며 사무실에 들어섰다. 그러나 콧노래는 금방 멈추어졌다. 길게 늘어뜨려진 팩스용지 때문이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곳에서 밤새 보내온 광고였다. 돈을 빌려준다는 사채회사 광고, 빚으로부터 해방된다는 법무사무실의 안내장, 그리고 아이러니하게 돈을 받아준다는 광고도 있었다. 아까운 용지를 찢어 버리는 짜증 속에서도 창과 방패가 싸우면 어떻게 될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어 헛웃음이 나왔다.

뉴스도 즐거운 소식은 없었다. 오르는 물가와 내려가는 증시 소식에 더욱 우울해졌다. 점심은 기분전환을 할 겸 반주를 한잔 하고 싶었다. 아직도 운 좋게 금융기관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하였더니 하필 출장 중이라 자리에 없었다. 공손한 여직원의 응답에도 뭔가 계속 어긋난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입맛이 없어 내키진 않았지만 근처의 식당으로 갔다. 음식이 나왔는데 종업원이 나보다 늦게 주문한 손님에게 내려놓았다. 그 사람도 이상했던지 나를 힐끗 보았지만 말하기도 그렇고 그냥 신문을 보는 체 하였다. 잠시 후 그의 배려로 식사가 나에게로 돌아왔지만 기분이 개운하지 않았다.

소공원 벤치에서 커피를 마시며 출근 때부터의 일을 돌이켜 보았다. 생각할수록 이상한 하루였다. 종일 이해하기 힘든 일만 벌어지는 것이 마치 누가 기획해놓은 상황을 한 가지씩 실행 당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일이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오늘 하루 별로 손해 본 것도 없는데 괜히 민감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조심스러웠던 하루를 끝내고 집으로 가고 있던 중 연료 등에 불이 들어왔다. 단골 주유소가 있었으나 경고등에 신경이 쓰여 가던 길가에 있는 주유소에 차를 세웠다.

카드를 꺼내며 별 생각 없이 본 가격이 평소에 다니던 곳 보다 엄청 더 비쌌다. 기름을 넣고 있는 직원에게 게시 된 가격이 맞느냐고 물어보니 그렇다면서 자기네가 시내에서 제일 비싸다고 하였다. 가만히 듣고 보니 가격보다 말투에 더 짜증이 났다. 젊은이를 불러 나무라려던 순간 잊고 있었던 오늘의 일진이 다시 생각났다. ‘그래, 오늘은 무조건 참자. 다음엔 여기 안 오면 되지하고 출발했다.

꼬인 하루였지만 별 탈 없이 집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또 무슨 안 좋은 소식인가 하고 긴장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에서는 지방에서 직장을 다니는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회사 전체에서 한 명 뽑는 우수사원으로 선정되어 외국연수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 한마디에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