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창정궤(明窓淨几)를 위하여 / 조윤수
참 다냥한 아침 햇살이다. 봄이 되자 거실로 들어오던 햇살은 베란다에서만 놀다 간다. 작은 유리 차관과 잔 하나와 보온병을 들고 창가에 앉는다. 멀리 동쪽 바다로부터 봄바람을 거느리고 와서 이 작은 창안으로 들어와 준 해님께 찻잔을 들어 경배한다. 겨울에 피었던 차 꽃이 말라붙어 있는 차수분(茶樹盆) 가지에 새순이 피고 있다. 햇순을 따서 그대로 씹으면 단 침이 고여 생 햇차 맛이 된다. 너무 고귀해서 쳐다보며 차를 두 차례까지만 마시고 먼 산자락 끝으로 펼쳐지는 봄날의 정경들을 마음에 안아본다.
차 맛이 입안에 맴돌아 몸속으로 퍼지자 생기가 일어서 얼른 밥상을 준비한다. 어제는 오전 내내 침대에서 신문도 보고 전화도 걸다가 거실로 나와 운동을 하고 다시 침대로 들어갔다. 햇살이 방안을 헤집어서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던 것이다. 가까운 언덕에서 나물을 뜯었다. 언제부터인가 꽃피는 사월은 황사 바람으로 맑은 날도 연둣빛 물오르는 산경(山景)은 늘 부옇다. 바람이 몹시 세어서 추웠지만, 고덕산을 넘는 노을이 고와서 마음이 훈훈했다. 쑥을 다듬어서 국을 끓이고 나물 전을 부치는 등 두어 시간 걸렸다. 이렇게 봄나물을 초대하여 식사하는 것이 나의 진정한 봄맞이다. 3월도 되기 전에 성급히 제주도의 봄부터 맞고 왔지만, 이렇게 해야 온전한 봄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 아니랴! 밥 먹고 다시 햇살이 가기 전에 차 한 잔 더 나누련다.
차나무에서 새순이 피어나는 것을 보니 또 차신(茶神)이 속닥이기 시작한다. 남녘에는 벌써 차를 따는 곳이 있으리라. 분의 차나무에서 새순이 나온 걸 보면 우리보다 위도가 낮은 중국의 차 산지에서는 차 따는 시기를 청명(4월 5일경) 곡우(4월 20일 경)라 할 만하다. ‘청명은 너무 빠르고 입하는 너무 늦다. 곡우 전후가 그 시기에 적중하다.’ 하지만 이곳 날씨로 그 시기는 빠르다. 벌써 제주도에서는 차를 딴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동에서 나는 우전차(곡우 전에 딴 차)를 아주 귀한 것으로 수선대지만 많지도 않아서 값만 매우 비싸다. 맛으로 보아서는 참으로 앳된 맛이다. 차의 정신을 알고 보면 우전차가 좋다고 떠들썩거릴 필요도 없다. 차는 모두 다 고귀하다. 절강의 장흥현 사람들은 입하 전이 아니면 차를 따지 않는다. 처음 차를 따기 시작한 것을 밭을 연다 이르고 입하 때부터 딴 것을 봄 차라고 했다. 우전의 세작 차茶 사기를 마땅해하는 것은 옛 상식(당송대)에만 익숙하고 오묘한 이치를 이해치 못한다고 허차서도 말했다. 지방마다 산지마다 다르다.
중국 명나라 때는 잎차 시기였다. 허차서는 그의 다소(茶疏)에서 차 마시는 때를 24가지 열거했다. 나는 그중에서 가장 좋은 때를 '심수한적(心手閒適)'과 '명창정궤(明窓淨几)'를 들고 싶다. 심지(心地)와 수족이 한적할 때를 첫 번째로 곱았다. 여자들은 결코 심지와 수족이 한적하기가 그리 쉽지 않기에, 나는 '심수한적'하고 싶을 때로 한다. '방우초귀(訪友初歸)'도 적절한 때이다. 벗을 방문하고 막 돌아왔을 때, 특히 밖에서 사람을 만나거나 일이 있었을 때는 그 뒷맛을 갈무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부녀자들이 아침 일을 마치고 잠시 쉬고 싶을 때가 밝은 창가에서 갖는 커피 타임일 것이다. 그러나 차 맛에 길들이게 되면 좀 더 깊은 명상으로 들 수 있는 시간이 된다. 오늘 같은 햇살 좋은 창가에서라면 '명창정궤'가 얼마나 적격인가. 따로 이런 서실은 없지만, 깨끗한 집 맑은 한지 창 아래 깨끗한 책상도 갖추지 못하지만, 이런 햇살에서는 늘 '명창정궤'가 그립다. 생활 속에 있었지만, '명창정궤'란 말을 음미하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다소의 차 마시는 때를 열거한 글에서 '명창정궤'란 글귀를 보았지만 허투루 보았다. 지난해 홍해리 시인의 '명창정궤(明窓淨几)의 시(詩)를 위하여'란 시(詩)를 소개받은 후에서야, 다소(茶疏)의 '명창정궤'가 가슴에 꽂히게 되었다. 그리도 절묘하게 차 마시고 싶은 때이다.
시인의 '명창정궤의 시(詩)를 위하여'는 차 맛이나 차(茶)의 정신도 충분히 담고 있다. 너무 긴 시(詩)여서 여기에 다 인용하지는 못한다. 시인이 일생을 통하여 얻은 지혜의 압축인 것도 같은 장시(長詩)이다. 한 마디로 시인은 혹은 문인은 '오로지 올곧은 선비의 양심과 정신이 필요할 따름이다' 라고 하는 것 같았다.
“시인은 감투도 명예도 아니다
상을 타기 위해, 시비를 세우기 위해, 동분하고 서주할 일인가
그 시간과 수고를 시 쓰는 일에 투자하라
그것이 시인에겐 소득이요, 독자에겐 기쁨이다
오로지 올곧은 선비의 양심과 정신이 필요할 따름이다.
변두리 시인이면 어떻고 이웃사이더면 어떤가
목숨이 내 것이듯 시도 갈 때는 다 놓고 갈 것이니
누굴 위해 시를 쓰는 것은 아니다.
시詩는 시적是的인 것임을 시인詩人으로서 시인是認한다
생전에 상을 받을 일도, 살아서 시비를 세울 일도 없다
상賞으로 상傷을 당하고 싶지 않고 시비詩碑로 시비是非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
시인은 새벽 한 대접의 냉수로 충분한 대접을 받는다.
시는 시로서, 시인은 시인으로서 존재하면 된다.
그것이 시인이 받을 보상이다.”
장시(長詩)의 대미를 그렇게 쓰고, 맨 끝을 ‘여시아문(如是我問)'으로 마감했다. 시인은 “살기 위해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다. 잘 죽기 위해서 시를 쓰는 일이란 다짐을 다시 한 번 다져 본다.”라고 했다. 나도 꼭 그렇게 잘 죽기 위해서 글을 쓴다.
햇살 밝은 창가에서 마시는 차 맛이 깊고 고요하다. 오늘 마신 녹차는 묵은 중국녹차이다. 지난겨울에 큰언니 댁에서 마시던 차이다. 내가 차를 좋아하니까 내놓은 것인데 언니는 잘 마시지 않아서 뜯은 채로 한 통 그대로 있었다. 내가 가지고 와서 다시 햇 맛이 나도록 볶았더니 깊고 고소한 맛을 다시 내게 되었다. 묵은 것은 묵은 대로 그 성질을 알고 우려내면 좋은 맛을 찾아낼 수도 있다. 묵은 맛이 좋을 때가 잦다. 늘 새로운 오랜 친구, 늘 새로 맞는 햇살, 매일 먹는 새 밥과 물, 특히 오늘같이 옆에 있어도 그리운 봄 햇살 속의 묵은 차가 그렇다.
차를 잘 마시는 일이 쉽지만 않으나 잘 마신다고 해서 그 정신을 얻었다고 하기도 어려운 것 같다. 진정한 차의 정신을 챙기지 못해서야 어찌 차茶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다. 맛볼수록 묵은 차에서도 새 맛 나는 '명창정궤(明窓淨机)'의 정신을 음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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