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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회사 옷 / 임지영

회사 옷 / 임지영  

 

 

 

늦은 밤, 그가 힘겹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다. 기운 없이 축 늘어진 몸으로 잘 다녀왔다는 인사를 그는 눈으로 한다. 흐느적거리며 회사 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쳐 놓는다. 힘없이 걸려 있는 그의 옷에 내 시선이 머문다. 분명 육신肉身이 빠져나온 옷일 진데 그 모양새는, 어깨 축 쳐져 지금 욕실로 걸어 들어가는 그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주머니 마다 불룩하다. 허리띠가 끼워진 채, 의자에 앉아 있었던 모양새대로 자잘한 구김도 있고, 움직임이 많은 부분은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바지만 보았을 뿐인데 마치 그의 하루가 보이는 듯 했다. 작은 컨테이너 박스의 건설현장 사무실, 그는 책상 앞에 몸을 구기고 앉아 며칠째 두 세 사람의 몫을 혼자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파트 시공이 끝날 때 즈음엔, 같이 지내던 동료들도 일이 있는 다른 현장으로 발령發令을 받기 때문이다.

회사 옷을 잡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제법 묵직한 것이 한주먹 잡힌다. 그것들을 끄집어내어 탁자위에 올려놓는다. 하루 종일 이것으로 뭔가를 끄적거렸을 모나미 볼펜, 네 알 먹은 흔적이 있는 위장약, 구겨진 영수증, 식권, 회사 명찰, 명함들이 가지런히 포개져 있었다. 하고 싶은 말들을 주머니 속에 포개고 꾹꾹 누르며 하루를 보내지는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돈이라고 생긴 것은 없고, 전부 회사에서 쓰는 것들뿐이었다. 주머니에 돈이 없어 옷이 더 무겁게 느껴졌던 것일까? 새삼 가장으로써 그가 느끼는 무게를 짐작해 보았다.

건설경기는 점점 악화되었다. 아파트를 새로 짓는다는 수주도 없을뿐더러 재건축도 없다. 같이 근무하던 동료들이 다른 지방으로 근무지를 옮겨 갈 때마다 그는 매번 가슴을 졸였다. 자신은 제발 대구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발령이 나기를, 9월 까지는 여기서 버틸 수 있기를바랐지만 모두 이뤄지지 않았다. 다음 달부터는 당장 연고도 없는 경기도까지 가서 근무를 해야만 한다. 그가 바라던 것은 돈을 많이 받기 위함도, 높은 직책으로 승진을 하고자함도 아니었다. 단지 가족과 멀리 떨어지지 않기를 바랐지만, 당장 퇴사를 할 수도 없는 가장의 무게는 지금보다 열악한 조건이라 하더라도 모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회사일이 힘든 것보다, 사소한 말 한마디 붙일 곳 없다는 외로움이 그에게는 더 견디기 힘든 일이 될 것이다.

얼마 전에는 옷 속에서 구겨진 봉투 하나를 발견했었다. 분명 그의 필체였다. 몇 번이나 고쳐 쓰고 다시 쓴 흔적이 있는 사직서, 차마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쥐었다 펴기를 반복한 구김이었다. 당장에라도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이 밀려왔다가도, 봉투를 손에 꼭 잡고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으리라. 그 순간에도 그는 가족의 얼굴을 제일 먼저 떠올리지 않았을까. 두 번의 이직과 퇴사, 회사의 부도로 밀린 임금을 받지 못한 채 인생의 쓴맛을 봐야 할 때도 있었다. 돈이 전부가 아닌 세상에서 살고 싶었지만, 정작 돈이 없는 생활은 고통이었다. 그때는 젊었고 뭐든 다시 시작하면 되었지만, 이제는 나이라는 문턱 앞에서 당장에 회사를 퇴사한다면 현실에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진다. 무작정 지금을 버텨야 한다고 의식하니 더 힘든 것은 아니었을까.

미안했다. 적어도 그와 함께 세상의 무게를 감당해야 함에도 난 정작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조금이라도 쉬고 싶다는 그에게, 아직은 안 된다며 밖으로 내몰았었다. 아이들이 크는 속도가 언제부턴가 버겁게 다가왔었고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생각을 속주머니 뒤집듯 잠시 뒤집어 보았다. 그가 힘을 낼 수 있는 것도, 다시 일어 설 수 있는 것도, 지금 순간을 살며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 하는 것도 모두가 가족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 순간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다가왔다.

땀에 찌든 그의 회사 옷을 움켜쥐었다. 안방 욕실에 들어가 그의 옷을 세탁한다. 조물조물 주무르고, 바지 단은 비비고, 치대서 땟물이 빠질 때까지 오래도록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의 피곤도 빨래에 씻기길 바라는 마음으로 비눗물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여러 번 헹구어 비틀어 짰다. 밤사이 건조 될 수 있도록 탈수기에서 나온 옷들을 곧바로 다림질 했다. 구겨져 있던 부분은 펴고, 바지에 줄을 세운 뒤 다리미로 빳빳하게 힘주어 다렸다. 오랜만에 한 줄만 곧게 뻗어 잘 다려 진 바지를 보며, 이 바지를 입는 그의 다리에도 내일은 빳빳하게 힘이 들어갔으면 했다. 그리고는 주머니 속에는 식권과 명찰만 넣었다. 다른 주머니들 속에는 내일만이라도 쉴 수 있었으면 하는 나의 바람을 넣었다.

그래, 지금처럼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을 열심히 하면 되는 거야.’ 안되면 되게 하고, 모르면 다시 배우고, 외로우면 외로운 대로, 닥치는 대로 마음먹은 대로 그렇게 말이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현실 앞에서, 그도 이렇게 매일 힘을 내고 있지 않은가. 마음만 곁에 있다면 몸은 아무리 멀리 있다고 하더라도 서로에게 가 닿을 것이다. 이제는 경기 침체도 외로움도 더 이상 나에게는 위협이 되지 않았다.

내일도 변함없으리라. 빳빳하게 잘 다려진 바지를 입고 힘차게 현관문을 나서며 그는 분명 내게 손을 흔들 것이다. 설핏 현관문 틈으로 슬며시 빠져나가는 바지 단 사이로 그의 미소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