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봉 고행 / 안량제
설악산은 이름그대로 악산이다. 높기도 하지만 면적도 엄청나게 넓고 큰 산이면서 경관도 뛰어나서 등산관광지로도 이름난 산이다. 정상인 대청봉을 오르는 등산로도 여러 곳에 있고, 산장도 겸비되어 등산객과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길잡이 없이 무모한 산행을 하면 조난당할 위험성도 있는 산이기도 하다.
십여 년 전, 친구가 설악산 대청봉산행을 제안했을 때는 자신 만만했었다. 산을 좋아하고 몇 번 오른 경험이 있어서 기꺼이 동행 했었다. 새벽에 출발하여 국립공원 남설악 관리통제소를 통과한 것은 오전 11시경이었다. 오늘 산행은 오색에서 대청봉에 올라 중청 산장 숙소까지다. 산은 숲이 더 울창했고, 그 곳 그 자리는 변함없건만 나는 쇠잔해졌다. 세월이 흘렀고, 병을 앓은 적도 있어 체력이 약해진 것이다. 그것을 생각 못하고 의욕만 앞세워 욕심을 부린 것이 화를 자초했다.
정상만 오르면 중청대피소에 숙소를 예약했으니 그 곳까지는 무난할 것으로 믿고 마음을 느긋하게 갖고 쉬엄쉬엄 올랐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해가 저물어 가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니 마음이 초조해졌다. 나를 믿고 당당하던 친구도 당황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먹을거리를 준비 못해 허기가 지고, 기진해서 몇 발짝을 옮기는 것도 무척 괴로웠다. 대청봉 가는 오르막길이 나에게는 벅찬 고행(苦行)이었다.
친구는 이정표를 살피고 남은 거리와 시간을 저울질하며 초조함을 감추지 않고, 산악구조대에 구원 요청을 하자며 채근을 하건만 나의 오만은 숙일 줄 모르고 조금만 더 힘을 내자고 독려와 격려했지만, 사실은 내가 더 힘들었다.
먹을거리라고는 물과 즉석커피뿐이었다. 산장에 가면 먹을 것을 팔고 있다고 믿으라고 큰소리쳤지만 미리 준비하지 않은 내 잘못이 컸다. 오색에서 준비한 주먹밥 도시락을 힘들게 지고 왔는데, 그것마저도 짐이 무거워 힘들다며 정상 못미처 던져버린 어리석은 나의 오만이 화를 자초했다.
참다못한 친구가 대피소에 구원 요청을 했으나 직원이 모자라서 지원할 수 없다는 답에 크게 실망했었다. 이러다가 조난을 당하는구나하고 탄식할 만큼 다급해졌다. 상황이 위급한데도 친구는 지혜롭게 대처했다. 노령을 구실로 현재 상황을 설명하며 계속 구원 요청을 했다.
문명의 이기인 휴대전화가 위기의 순간에 대단한 도움이 되었다. 물에 빠져도 정신만은 잃지 말라는 선현들의 말이 생각났다. 우선 물이라도 마셔야 고비를 면하겠다는 생각으로 마지막 남은 커피와 물로 숨을 돌리며, 절박한 위기를 극복할 수단을 궁리했다.
천우신조(天佑神助)던가! 구조대원의 불빛 신호가 왔다. 이제 살았구나 하는 순간 내 손을 잡고 걱정 말라는 구조대원의 위로와 격려의 말이 꿈인가 환각인가 내 살을 꼬집어 봤다. 꿈이 아닌 현실에 정신이 번쩍했고 그에게 몸을 맡겼다.
멀찍이 보이는 산장의 불빛이 구원의 빛이었다. 비탈진 돌길을 조심조심, 산장을 향해 가는 중에 살상 가상으로 강풍을 만나 날려갈 것 같은 위기도, 구조대원의 팔에 매달려 어렵게 산장에 도착했다.
기대했던 산장에는 허기를 면할 음식은 없었고, 생수와 캔 커피와 같은 음료수뿐이고 단하나 즉석밥이 있기는 했다. 그러긴 해도 소금도 없는 맨밥이요 물에 말아 떠먹을 숟가락도 없어서 나무젓가락으로 몇 번 집어 먹어 봤지만 허기를 면하지 못했고, 초코파이는 간식에 불과했다.
저녁조차 굶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너무 지치고 긴장한 탓이었던지, 깊은 잠을 못 자는데 옆 사람 코고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려서 잠까지 설치고 아침이 되었다.
하산도 걱정이었다. 당초 계획은 천불동 계곡 따라 비선대를 거쳐 설악동으로 하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숙소를 함께 한 산행객들과 산장관리 직원이 극구 말렸다. 거리도 멀고 경사가 심한 비탈길에 비가 내린 뒤라 길이 미끄럽고 위험하니 오색으로 되돌아 하산하는 것이 안전 하다고 모두가 권했다.
굶은 배에서는 쪼르륵 소리가 나고 허리가 저절로 굽혔다. 초코파이에 캔 커피와, 생수로 아침을 때웠다. 점심을 대신할 초코파이와 생수 등 몇 가지를 준비하고, 어제 밤 도와준 산장 직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여럿이 권하는 대로 오색으로 하산하기로 했다.
어제 저녁 강풍으로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 대청봉 표지석을 확인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보고할 일도 아닌데 훗날, 대청봉 올랐던 기억을 남기고 싶은 욕심이었다.
내리막길이라 쉽게 생각한 실수를 다시 범했다. 어제 낮부터 굶은 허기로 체력이 소진된 탓인지 다리가 풀리고 발이 옮겨지지 않아 주저앉고 넘어지며 억지로 몇 걸음씩 옮겼다.
이 꼴을 지켜보며 뒤 따라 오던 중년의 등산객 한 사람이 추월해서 앞서 가는가 했더니 몇 번을 뒤돌아보며 한참동안 빠른 걸음으로 내려간다 싶었다. 그런데 의외였다. 내려가던 그 사람이 숨을 헐떡이며 되돌아서 내가 주저앉아 있는 곳까지 다시 와서는 부축을 했다.
어디 사는 누구인지도 모르고 단지 고마운 사람이란 생각만하며, 험한 산길에서 내 몸을 맡기고 걸음을 옮겼다. 코스의 중간쯤에서부터 나를 부축하여 내려왔으니 꽤 먼 거리요 오랜 시간이었다.
그분께 집이 어디냐 물으니 저녁 일곱 시 반 서울행 차를 타면 된다고만 말하고 다른 말은 않고 험한 산길을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너무 미안해 차 시간 늦기 전에 빨리 가라고 한사코 떠밀어도 괜찮다고만 하고 나를 부축했다. 산을 거의 다 내려왔을 즈음 119산악구조대에 전화를 몇 번인가 하고 그제야 간다고 하며 조심해 가시라는 인사만 하고, 사는 곳과 연락처를 물어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뜀질로 떠나버렸다.
그의 뒷모습만 멀거니 바라보며 요즘 같이 각박하고 이기적인 세상인심에 저렇게 고마운 사람도 있나 싶어 가슴이 뜨거웠고 눈시울이 젖어왔다. 그분은 끝내 사는 곳도 말하지 않고 그렇게 떠나버렸다. 다시 만날 기약은 없지만, 그분은 히말라야 최고봉에 올라 태극기 날리는 당당한 모습의 사진을 보여줄 것이라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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