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길 물속 / 서경희
지하철에서 한 여인이 큰 소리로 휴대전화를 하고 있다.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는 그녀에게는 지금 순수 열정만이 가득하다. 누구든 통화 중에는 저렇게 안하무인의 열정에 빠지기 쉽다. 눈살을 찌푸리고 못마땅해 쳐다보는 사람이 여기저기 있어도 여전히 천하무적의 당당한 모습이다.
아! 저게 내 모습이 아닐까? 나도 공공장소에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제 동반외출 1호가 된 휴대전화는 이렇게 이 시대의 ‘메너척도’ 1위 역할에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다.
통화 중에는 누구든 두 사람만의 천하통일이 이루어진다. 다른 사람은 뒷전의 돌일 뿐이다. 그래서 가장 은밀한 사랑고백은 전화통화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희한한 세상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이 휴대전화가 지금은 온 국민의 손에서 요상한 도깨비 노릇을 하고 있다. 이것이 없던 시절, 우리는 황량한 벌판을 누비던 고단한 원시인이 아니었을까?
잠깐 ‘전화’에 대해 추억에 잠겨본다.
4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전화는 부의 상징, 문화의 상징이었다. 몇 년을 기다려도 전화 들여놓기가 과장하여 앞산을 뒷산으로 옮기는 만큼이나 어려웠던 시절. 전화를 갖춘 집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내가 초등학교 다닐 무렵의 시절에는 전화다이얼 돌리는 행위가 지금의 인터넷 검색 같은 첨단 행위이기도 했다.
그 원시의 계곡을 건너 문명의 강가에 이른 지금, 손안에 들어있는 저마다의 전화기는 ‘세상이 모두 이 손안에 있소이다’를 외치며 장대한 시대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인류가 지금까지 이룩해온 모든 문명의 총칭이 다 들어있다는 놀라운 이 휴대전화는 지금까지 이룩해 온 우리의 일상생활도 송두리째 바꿔놓고 말았다.
지난 어버이날 딸아이한테 빨간색 휴대전화를 선물 받았다. 무능한(?) 옛것은 던져버리고 이제 첨단기능을 두루 갖춘 예쁜 새것을 주위에 자랑하며 챙겨 다닌다. 이전에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자주 핀잔을 듣곤 했다. 왜 전화를 받고도 ‘부재중 통화’를 확인하고 다시 걸어주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전화기에는 그런 장치가 없었다. ‘답답하면 다시 하겠지’라는 느긋함이 끝이었다. 일일이 즉각 대응을 한다는 것이 피곤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번 새 전화기는 확인 버튼만 누르면 받지 못한 상대 전화와 자동연결이 될 수 있다. 지금 나는 외면했던 그 편리성에 중독되어가는 나의 간사함에 스스로 놀라고 있는 중이다. 고상한 척 홀대했던 한때의 촌스러움에 실소하며, 이제야 이 시대에 맞는 예의범절을 지키는구나, 흐뭇해하고 있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편리는 계속해서 또 다른 편리를 부르고 마침내는 갈증의 목만 태우고 마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리고 우리가 지나치게 다른 사람과 밀착해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를. 상대에 대해 가까이 다가가는 만큼 피로감에도 그만큼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아닌가. ‘모른 것이 약’이라는 속담이 새삼 신선하다.
정보화시대는 무엇이든 알아야 하고 모르는 만큼 퇴보하는 것이라는 강박관념이 있다. 그러나 전화기 하나로 정보와 교류와 편의를 모두 누리는 이 놀라운 시대에 진정 내가 무엇을 제댈 하나 알고 있는가가 더 궁금해질 때가 많다.
밀집해 살아가는 아파트 생활, 개인정보도 맘껏 훔치는 사회, 내 아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시시각각 체크할 수 있는 이 ‘투명한’ 시대에 실은 우리가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불투명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드는 것이다.
문자메시지를 통한 순간의 소리 없는 대화, 인터넷, 영화, 음악, 선별수신 등 손안의 기계로 만능의 세상을 휘젓는 듯해도, 우리는 겨우 한 척의 외로운 배에 의지하고 있는 고립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열 길 몰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상의 정보와 지식은 그래도 ‘알 수 있는’ ‘열 길 물속’과 같은 것이다. 열 길 몰 속은 알아도, 기껏 한 길밖에 안 다는 사람 마음속은 모르는 것이 삶이다.
인간은 불투명한 존재다. 아무리 놀라운 전보능력의 기기(器機)라고 마음의 정보를 캐낼 수는 없다. 인간의 마음은 어떤 심오한 기계로도 측정할 수 없는 심오한 것이다. 시간과 함께 조금씩 벗겨지는 밝음의 세계가 아니라 영원한 어두움을 떠나지 못하는 암흑 물질이 인간이다. 영원한 암흑 물질인 인간은 우주만큼 난해할 뿐이다.
손안의 그 편리한 전화기로 끊임없는 정보교류를 해도 마음의 암흑은 교류가 되지 않는다. 암흑 물질을 한 겹도 벗기지 못하는 놀라운 이 기술의 세계가 그저 ‘열 길 물속’ 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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