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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불빛 / 박용수

불빛 / 박용수  

 

 

 

산촌과 도시의 야경은 사뭇 다르다. 도시의 불빛이 대낮처럼 훤한 인공의 불빛으로 아름답다면, 산촌은 밤하늘을 수놓은 자연의 별빛으로 아름답다. 도시의 불빛이 요란스러운 구급차와 같이 역동적이라면, 산촌의 불빛은 풀잎 속에 맑은 광채를 내는 반딧불과 같이 정적이다. 사나이의 가슴에 타오르는 뜨거운 열정이 도시의 불빛이라면, 산촌의 불빛은 아낙의 볼에 수줍게 피는 순정인지도 모른다. 천상과 지상에서의 빛 잔치, 밤과 낮의 시차를 달리한 아름다운 경쟁, 빛과 어둠의 기묘한 순환. 그 불빛을 보고 있노라면 내 마음도 부나방처럼 금방 뜨거워진다.

두메산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우리들의 고등학교 진학이 도회지 생활의 시작이었다. 읍으로 진학한 몇은 통학을 했지만 대부분 광주로 진학하여 변두리 허름한 집을 얻었다. 몇은 하숙을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자취를 했다. 나도 학동팔거리에 허름한 방 한 칸을 얻어 둥지를 틀었다. 어린 자식의 낯선 도시 생활이 걱정되었는지 어머니는 할머니를 딸려 보내셨다.

고등학교는 입학 첫날부터 야간자습이었다. 그렇게 매일 반복되는 생활, 야간자습을 하고 돌아오면 그때마다 할머니는 골목길을 서성거리고 계셨다. 회갑을 넘긴 할머니도 첫 도시 생활인지라 말동무조차 없었으리라. 비바람과 눈보라 속에서도 1년 내내 할머니는 나를 기다리며 그 고샅에 서 계셨다. 보호라기보다 감시라도 하는 양하는 할머니의 경계 근무 너머 봉창에서는 어김없이 희미하나마 불빛이 새어 나왔다.

방은 나 혼자 몸도 펼 수 없을 정도로 작았는데 할머니까지 차지했으니 여간 비좁은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할머니는 늘 나보다 늦게 잠들었고, 나보다 먼저 일어나셨다. 그렇게 1년이 다되어 가도록 할머니의 감시를 받아 가며 학교를 다니던 어느 겨울, 야자를 하고 돌아오던 늦은 밤, 하얀 눈을 밟으며 고샅을 막 들어선 나는 섬뜩 놀랐다. 항상 환하던 고샅이 어두컴컴했다. 여느 때와 달리 봉창 불빛이 그날따라 꺼져 있는 것이다. 아니 여지없이 고샅 앞까지 나와 나를 감시하던 할머니께서 보이지 않았다. 어둠을 밟으며 집 앞으로 조심조심 걸어갈 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가 사는 자취방이 그날따라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듯 흉가처럼 음산하게 느껴졌다. 용기를 내어 안집을 돌아 자취방으로 들어가니 방 안은 텅 비었고, 할머니의 옷 몇 가지만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 후, 나는 간혹 고샅 초입에서 되돌아 나가곤 했다. 불이 꺼져 있는 봉창을 보고는 곧장 남광주역으로 가곤 했다. 생전 할머니께 잘해 주지 못한 자책감 때문이었다. 역전 포장마차에서는 100원에 소주 두 잔을 주었다. 한 잔은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채웠고, 또 한 잔은 할머니에게 잘해 주지 못한 자책감으로 마셨다. 한 잔은 할머니의 보호를 감시로 여긴 내 옹졸함을 비우기 위해 마셨고, 또 한 잔은 할머니의 영원한 안식을 채우고자 마셨다. 그렇게 잔술을 몇 잔 마셔야만 고독으로 충만한 고샅을 걸어올 수 있었고, 싸늘한 방바닥에 등을 맡긴 채,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방바닥에 누우면 할머니의 콜록거리는 소리가 먼저 다가왔다. 감기를 끼고 사시는 것을 알면서 약 한 번 사다 드리지 못한 매정한 손자를 아랫목으로 밀어내시고 당신은 손수 윗목의 냉기마저 신열로 데워냈던 것이다. 그런 할머니의 옛정에 빠져 있노라면 내 손자 내 손자하시던 할머니의 사랑이 금방 연탄불처럼 번져 오는 것 같았다. 그렇게 조금만 기다리면 할머니의 온기가 구들을 통해 내 온몸으로 퍼지고 나는 그 온기에 중독되어 나도 모르는 잠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할머니가 계시는 동안, 내 의식 속에 들어오지 않았던 일상의 불빛들이 할머니를 떠나보낸 훗날, 비로소 내게 따뜻함으로 다가왔다. 어둠 속을 더듬거려 스위치를 찾는 동안의 공포, 아궁이를 확인할 때마다 느껴야 할 차가움, 식은 연탄불과 꺼진 불빛, 그 쓰디쓴 냉기는 내 몸속에 구석진 고독의 싹을 조금씩 틔웠는가 보다. 할머니의 온실에서 건강했던 안온함과 평화가 시들해지고 서릿발처럼 서늘한 외로움이 하루 동안 수도 없이 돋아났다. 나는 그때 그 불빛을 지켰던 할머니의 마음을 여태 헤아리지 못했다. 평생 산촌에서 사셨던 할머니는 온종일 방 안의 연탄불과 창문의 불빛을 지키는 등대지기였다는 것을. 어쩜 그 불빛보다 밤늦게 학교에서 돌아오는 손자의 모습을 지키는 진정 나의 등불이었음을 정작 할머니가 떠난 뒤에야 깨달았다.

항상 불빛을 앞세우고 정작 배경으로만 살아오신 당신, 고샅을 비추는 봉창 불빛이 아닌 손자에 대한 옹근 사랑의 징표였던 불빛. 간절한 기다림과 절대적 사랑이 빚어낸 불빛이었음을 알게 된 지금. 비록 할머니는 곁을 떠났지마는 당신이 남긴 불빛만은 은은한 산촌의 불빛처럼 지금까지 내 내면을 비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