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투썸 / 조성자

투썸 / 조성자

 

 

 

초등시절 체육시간에 하던 놀이가 있다. '짝짓기 놀이' 정도로 이름을 붙여야 마땅할 듯한데, 모두 모여서 노래하면서 선생님의 율동을 따라 하다가 호루라기 소리가 나면 지시에 따라 짝을 지어 모여야 하는 놀이다. '깊은 산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를 부르면서 빙글빙글 선생님 주위를 돌다가도 호루루 "빨강 옷 입은 사람" 하면 우리 중에 빨강 색 들어있는 옷 입은 아이에 붙어야 한다. 두리번거리고 달려가고 넘어지기도 하고, 그러다 무리가 커지면 붙은 아이들은 떨어지지 않으려고 꼭꼭 얼싸안는다. 깔깔거리면서 재미있어했다.

선생님이 <기찻길 옆 오막살이>를 시작하면 또 흩어져서 큰소리로 따라 노래하며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돈다. 호루루 "6"하며 손가락 여섯을 치켜 올리시면 6명씩 짝지으려고 이리저리 뛰고 엉키고 밀어내고, 누구야 오라, 야 너 나가, 모자란다, 너무 많아, 난리법석을 피운다. 당연 탈락자들이 생긴다. 아쉬운 표정으로 열외가 된다. 놀이판에 끼지 못하고 가장자리로 나가서 앉아있어야 한다.

그때 그 선생님은 놀이의 하이라이트가 어디라고 생각하셨는지 모르지만, 나는 호루루 "2"이라고 손가락 둘을 올리실 때였다고 짐작한다.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기 때문이다. 기억도 선명한 어느 날이었다. 온 반 학생들이 모두들 잽싸게 둘씩 짝을 지어 버리는 바람에 얼떨결에 나 혼자 남았던 그 순간.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모두 다 짝이 있다. 투썸이 되지 못하고 나만 혼자다. 지금도 그 순간의 당혹과 떨림이 생생하다. 세상은 정지하고, 홀로 뎅그러니 남겨진 그 짧은 순간의 공포를 잊지 못한다.

첫아이를 낳고 나서 여자들은 여러 가지 병에 걸린다고 하는데, 주로 호르몬 불균형으로 인한 정신과 계통 병들이다. 나도 상당히 고생한 병이 있는데, 정신과에서 진단 받은 병명은 '허스번드 디펜디드 뉴로시스'였다. 남편 의존성 신경증. 고약한 증세가 연일 이어졌다. 숨이 막히고 온몸에 힘이 빠져 갑자기 쓰러지니 혼자 있기가 무서웠다. 평생 가장 힘든 기간이었던 것 같다. 노처녀로 혼자 살다가 투썸이 되어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의존 병에 걸린 것이다. '탱고도 둘이 춘다(It takes two to tango)'라는 서양 속담이 있지만 이건 탱고 춤을 너무 추웠다는 말일까. 탱고 파트너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있어서 무사히 빠져나온 병이기는 하지만, 본인이 자각을 못하더라도 무의식 속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면 그도 병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다정도 병이었던 것이다.

그때 낳은 딸이 삼십을 훌쩍 넘기고 있다. "그 나이에 엄마는 네 손잡고 유치원 데려다 주었다. 참고해라." 사람 인()자를 들며 나이 들었으면 부모를 떠나 서로 기댈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고, 혼자는 살 수 없는 게 인간이라고, 귀에 못을 박아 준다. 나이든 자식을 닦달 하고 있는 입장이지만, 어디 우리 집뿐인가. 요즘의 젊은이들이 쉽게 짝짓기를 하지 않는 것만은 사실이다. 투썸을 거부하고 혼자 살기를 선택하는 경우가 날로 늘어나는 추세다. 늦도록 결혼 안하는 자식을 마냥 조를 수만도 없는 것이, 경제 돌아가는 모양새도 젊은이들에게 힘들기 그지없고 늘어나는 이혼율도 만만치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좋다고 둘이 살다가도 얼마나 많은 일들이 벌어지는가. 싸우고 바람피우고 사고나 병으로 일찍 떠나기도 한다. 투썸은 결코 영원하거나 안정적인 것이 아니다. 내가 했으니 너도 하라고 무조건 권할 사항이 아닌 것 같다.

설령 운 좋게 무사히 투썸으로 오래 살았다 해도 언젠가 한쪽은 사라지기 마련이고 남은 한쪽은 혼자 남는다. 사람 인자가 둘이 기대선 모양으로 좋은 듯해도 두 획 중의 어느 하나는 언젠가 빠져나간다. 남은 획은 혼자다. 기댈 한 쪽 획이 없으면, 자식들마저도 멀리 살거나 기댈 형편이 되지 못하면, 의지하는 강아지에게 밥 줄 힘도 없어지면, 그야말로 투썸의 기대는 제로가 된다.

이래저래 투썸이 되지 못한 노인들을 위한 시설이 늘고 있다. 요양병원에 부모 모셔놓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느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매일 사탕을 선물 한다더라는 둥, 어느 할아버지가 어느 할머니 방에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기웃거린다는 둥, 삼각관계로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봤다는 둥, 에피소드가 많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할머니는 다른 병실의 모르는 할아버지 침대에 자꾸 몰래 들어가 잠을 자는 바람에 정신병동으로 이송되기도 했다한다. 오래전 운동장에서 하던 그 놀이에서처럼 짝을 못 짓고 홀로 남는 게 싫은 때문이려니. 무섭고 불안하기 때문이려니.

차이코프스키의 <외로움을 아는 자만이>를 듣다 말고 스마트 폰 주소록을 뒤진다. 누구에게 전화해서 한잔 하자고 할까. 아무래도 우울증 같다는 그 친구? 무슨 소리냐 각방 쓴지 오래된다는 그 친구? 오래전 교통사고로 남편 잃은 그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