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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죽방림 / 김현순

죽방림 / 김현순

 

 

 

하늘과 바다가 같은 색깔이다. 남해바다는 코발트에 가까운 푸른색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햇살 좋은 초가을 뭉게구름이 아름다움을 한껏 뽐낸다. 조각품을 만들려는가. 완성했나 싶으면 다시 흩어져 또 다른 작품을 만들고 다시 흩어진다. 자연의 창작품이 넓고 푸른 하늘 캠퍼스에서 마음껏 펼쳐진다.

미륵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다도해는 빼어난 절경이다. 바다의 생물 중 2만여 종이 봄에 부화한다. 이들이 합쳐진 쪽빛바다 밑에서는 생사를 겨루는 그들만의 생존경쟁이 한창이다. ‘통영 미륵산 케이블카를 타고 바라본 다도해의 죽방림은 그 규모만으로도 입을 다물지 못한다. 수확량도 엄청나련만 죽방멸치 대부분은 일본으로 수출한다.

죽방림은 시간의 흐름이 모인 곳이다 참나무로 말뚝을 박고 대나무를 촘촘히 역어 만든 멸치잡이 발이다. 남해에서는 이것으로 은빛 찬란한 으뜸의 멸치를 잡는다. 바로 죽방멸치다. 그물로 잡는 일반 멸치와는 달리 비늘이나 몸체에 손상이 없이 자연 그대로 유지된다. 대나무 어사리란 별칭도 있다. 간만의 차가 큰 해역에서 옛날부터 사용하던 고기잡이다. 남해안의 협수로에서 통발 목을 해저에 박아서 V자 모양으로 벌어지게 기둥들을 설치한다. 그리고 V자의 꼭지점에 해당하는 곳에 자루그물을 설치하여 어획하는 방법이다.

인간이 만든 지혜의 덫이다. 멸치 떼들은 그 주변에서 유영하다가 그만 그물에 잡힌다. 전진도 후퇴도 할 수 없는 갇힌 자의 고독. 제자리에서 맴돌던 그들은 곱디고운 모습으로 인간에게 바쳐진다. 바다가 주는 귀한 선물이다.

해초류는 바다를 품은 작은 우주다. 그 안에서 싱싱하게 자라난 플랑크톤은 멸치들의 우수한 먹거리 밭이다. 그들은 야행성이어서 주로 밤에만 활동한다. 갈치는 멸치를 가장 좋아해서 한 밤에 칼춤을 춘다. 죽방림은 달리는 삶의 현장이요, 바다의 문전옥답이다. 가끔 수달도 자루그물을 찾아온다. 그런 날이면 어부들에겐 횡재하는 날이다.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어느 어부의 아내를 만나서 말을 걸었다.

많이 힘드시죠?” 그녀는 해맑게 웃는 얼굴로 이렇게 답을 했다.

힘들죠. 하지만 죽방림은 가난한 친정보다 낫다는 말이 있지요.”

망설임 없는 그의 대답에 나는 조금 놀라웠다. 바다는 그들에게 새롭고 끝없는 희망을 준다. 어부가 물때와 멸치를 기다리듯 세월에 맞서며 서럽지만, 그를 인내하고 받아들이면 삶의 지혜와 부가 쌓이게 마련이다.

500여 년 이어온 황제멸치잡이는 기다림이다. 현실과 맞서 싸우기는 역부족이어도 어부들은 여전히 대나무 발을 촘촘히 엮으며 폭풍에 대비한다. 그들은 시련의 고통이 힘겹더라도 묵묵히 이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리라. 바다가 내준 것이니 사이좋게 나누어 먹기다. 죽방멸치는 아무 데나 있지도 않고 아무 데서도 살 수가 없다. 정성을 다해 차별화된 생육에서부터 그 진가는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어찌 보면 이와 같지 않을까. 부모는 자식을 으뜸으로 키우려 가정과 학교라는 울타리에서 최선을 다한다. 이상적인 인간으로 만드느라 자신의 한 생을 다 바친다. 그들이 세상 밖으로 나아가 은빛 나는 인격체가 되어 자식의 위상이 돋보이게 되면, 부모는 하늘과 땅에서 영광을 다 얻은 것이리라. 바로 사랑과 정성을 다한 시간의 흐름이 모인 결실이다.

이젠 얼굴도 가물가물한 나의 부모님도 오 남매를 키우시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옥석을 가리지 않고 사랑 하나로 최선으로 키웠다. 거기서 번져진 당대의 자손이 수십 명, 이 나이 되어 점점 더 깊게 감사와 회한이 겹친다.

나를 멸치로 비유하면 어떤 급일까. 죽방멸치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중급 이상의 멸치는 되지 않을까. 그래도 80녀 년을 탈 없이 내 분수 안에서 열심히 살아 온 딸이니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라고 했다. 늦은 감이 있지만 더 열심히 배우고 봉사하며 값있게 살아 은빛 인생으로 마무리하리라. 세월은 혹독한 추위가 떠나버린 자리에 봄기운을 몰고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