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삶 / 시오노 나나미
오드리 헵번이 세상을 떠났다. 이탈리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다. 아마도 그녀는 최후의 스타가 아니었을까.
우선 아름다웠다. 그리고 산뜻한 연기자였다. 그녀가 나오기만 해도 화면이 화사하게 변했다. 우아하고 센스 있고 품위 있었다.
오드리 헵번의 출세작 「로마의 휴일」은 1953년에 제작되었다. 그해 내 나이 열일곱 살. 그래서 나와는 같은 시대에 살았던 스타이다. 그렇다면 나는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유행을 잘 따르는 나였기에.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별로 영향을 받은 것 같지 않다. 젊은 여자에게서 영향을 받는 다는 것은, 동성이기에 더욱 그렇겠지만, 거기에 감정이입이 되느냐 안 되느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나는 그녀가 연기하는 여자에게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던 셈이다.
오드리 헵번의 많은 출연작 가운데서도 작품의 좋고 나쁨에 관계없이 여자들에게 인기 있는 작품은, 즉 여자들이 몇 번을 보아도 지겨워하지 않는 작품은 「로마의 휴일」, 「사브리나」, 「하오의 연정」 등일 것이다.
「로마의 휴일」은 어느 공주가 로마에서 휴일을 보내는 이야기이다. 다른 두 작품은 젊고 가난한 아가씨가 돈 많은 중년 남자와 결합되는 이야기이다. 즉 여자들에게 많은 신데렐라 증후군 에 초점을 맞추어 히트한 작품이다. 「사브리나」의 험프리 보가트, 「하오의 연정」의 게리 쿠퍼가 부자가 아닌 그냥 평범한 중년 남자였더라면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런 것도 괜찮지 않느냐는 나 같은 비신데렐라 증후군 외에는 그 영화를 보러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혀 영향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로마의 휴일」의 경우는 나 지신이 몇 년 뒤에 철저히 체험한 바였기에 여한이 없다. 「사브리나」는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영화의 파리에서 돌아온 오드리 헵번의 변신에 윌리엄 홀덴이 운전기사의 딸인 줄 모르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을 보면, 파리에서 돌아온 오드리 헵번의 슈트케이스는 하얀 양가죽으로 된 제품이다. 그때 나는, 우아한 여자의 슈트케이스는 저래야 한다고 마음 속으로 외쳤다. 그런데 그것을 실현하기까지 상당한 세월이 필요했다.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지금은 한 세트 가지고 있다. 다만 하얀 페르가모 슈트케이스를 들고 여행하는 것이 우아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런 타입의 슈트케이스에는 바퀴를 달 수 없다. 그래서 수레도 없고 벨보이도 없는 곳에서는 두 손으로 들고 가야 한다. 일본 남자들은 모르는 여자에게 절대로 도움을 주지 않으므로 더욱더 곤란하다. 전송과 마중이라는 허식을 싫어하는 나였지만, 그런 양가죽 슈트케이스를 들고 여행을 하는 한, 그런 마중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오의 연정」을 처음 본 것은 스물한 살 때였던 것 같다. 그 정도 나이라면 부자와 결혼하는 이야기에 푹 빠져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나의 비신데렐라 증후군의 원천은 평생 돈벌이와 인연이 없었던 아버지와 열두세 살 때 보았던 「마천루」의 게리 쿠퍼에 있었기에, 이때의 신데렐라 오드리 헵번에게는 감정이입을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마천루」는 자신의 건축이념에 대해서는 절대로 돈과 타협하지 않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하오의 연정」에 나오는 쿠퍼를 보면서 ‘부자 역할이 어울리지 않는데’라는 생각을 했다.
다만 한 장면만은 내 눈을 활짝 뜨게 만들었다. 극장의 3등석에 앉은 오드리 헵번의 시점으로 잡은 것인데, 여자를 데리고 1층으로 들어오는 쿠퍼의 등을 비추는 장면이었다. 나는 그 순간, 중년 남자의 매력은 등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역사 소설을 쓸 때, 한번 정도는 써먹은 말인 것 같다. 젊은 남자에 비해 나이 든 남자의 매력을 돌출 시키기 위해서.
여배우로서 오드리 헵번은 너무도 매력적이지만, 그녀가 연기하는 여자들에 대해서는 공감할 수 없었으니 나도 좀 삐딱한 데가 있는 것 같다. 부자라는 요소를 남자의 매력 포인트에 조금도 개입시키지 않는 나의 성향은 여자로서 구원받기 힘든 결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최근에 「보디가드」라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보지 않고도 분명히 히트할 것이라 생각했다. 남자에게 보호받는 것이 여자의 가장 큰 바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이탈리아에서도 히트를 쳤다. 그 이유는 내가 생각한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주연배우 케빈 코스트너의 인기 덕분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신데렐라 증후와는 평생 무관하게 살아온 나이지만, 보호받고 싶은 바람이 나에게도 충분히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보디의 가드가 아니라 하트의 가드도 마찬가지다.
보호받고 싶은 증후군은 신데렐라 증후군만큼 많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유쾌한 생각이 든다.
「보디가드」의 휘트니 휴스턴은 가수로서 일류이다. 노래는 그녀 혼자서 할 수 있다. 그러나 보호받으려면 남자가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연상을 해보면, 이런 결론에 이른다. 신데렐라 증후군은 전업주부가 걸리고, 보디가드 증후군은 커리어 우먼이 걸리는 병이 아닐까?
오드리 헵번과 같은 시대의 여배우로 그레이스 켈리가 있다. 그녀는 판에 박은 듯한 신데렐라형이다. 그런데 여자로서 오드리 헵번은 어떠했을까.
두 번 결혼한 상대를 보나, 인생의 마지막을 예감하고 선택한 여덟 살 아래의 애인을 보나, 신데렐라 타입의 여자가 선택할 만한 상대가 아니다. 무엇보다 거액의 위자료도 뜯어내지 않고 이혼을 하다니, 역시 신데렐라 풍토에 맞지 않다. 신데렐라를 연기했던 그녀였지만 여자로서는 보디가드 증후군에 속했던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결혼 후에 그레이스 켈리는 배우를 그만두었지만, 오드리 헵번은 유니세프 일을 비롯하여 줄곧 여배우로서 존재했다. 여자로서 일을 계속할 생각이라면 신데렐라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오드리 헵번이 연기하는 여자들에게 공감할 수 없었던 나이지만, 여자로서의 오드리 헵번에게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앞으로는 여덟 살 연하라도 나의 사정권에서 제외시키지 않도록 하겠다. 그녀가 이미 결혼이란 것을 경험한 뒤라, 사랑하면 결혼해야 한다는 젊은 여자의 일반적인 심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간 것도 마음에 든다.
신데렐라 증후군과 보디가드 증후군, 나는 여자의 선택에는 또 다른 하나가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힐러리 증후군’ 이라 할 수 있는 타입이다.
젊은 시절에 이렇다 할 남자에게 침을 발라 찜을 해놓는다. 그리고 그 남자의 야망 실현에 모든 정성을 쏟아붓는다. 아칸소라는 시골까지 따라갈 정도였으니 어지간한 각오로는 힘든 일이다. 일단 남자가 야망을 실현하면, 자신에게는 충분한 재능은 있었지만 여자라는 한계 때문에 불가능한 사업을 자신이 맡는다. 만일 그녀가 실패하면 남자도 나락에 떨어지므로 운명을 같이하게 된다.
나는 수재가 아니었지만, 전국의 수재가 모여드는 히비야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 학교의 머리 좋고 동작 빠른 여학생들 가운데는 괜찮은 남학생을 찜하는 애들이 꽤 있었다. 남녀 학생 비율은 남학생 네 명에 여학생 한 명꼴. 공부에 관신 있는 여학생이 적었기 때문에, 미래가 밝은 남자애를 만날 확률은 전국 최고였다.
그러나 그런 좋은 환경 속에서도 나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오로지 하얀 양가죽 슈트케이스의 ‘오드리 헵번’ 만을 좋아했다. 이렇게 된 이상 하트가드를 찾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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