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기름 / 한준수
물과 기름은 혼합할 수 없다.
인간도 성분은 같을지 모르지만 각자의 성격은 다를 것이다. 따라서 생활 습성이 영 딴판인 사람도 있다.
여기 그런 부부가 있다. 그 내용인 건 아내는 후다닥 성격, 남편은 차분하다. 예컨대 아내가 벗어 놓은 신발들을 보면 짝하고 헤어져 저어만치 나가떨어져 엎어진 게 있다. ‘네깐 놈이 먼저 놓여 있었으면 다냔’ 듯이 딴 신발 위에 올라가 엎어누르는 놈도 있다.
저 지난날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란 캠페인 글이 나붙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집 신발장 앞바닥에는 신발 위에 신발 있고, 신발 밑에 신발이 있는 날이 잦다.
슬리퍼 네 짝뿐인 화장실 바닥에도 이산가족 슬픔이 종종 생긴다. 한 짝은 욕조 앞에 나가떨어져 모로 서 있든지 엎어져 있다. 두어 짝은 열린 문 밑에, 한 짝은 문지방 앞에 놓여 있다. 그 걸 한 쪽 발에 신고 문기둥을 잡은 채 깨금발로 선다. 문 밑에 있는 놈을 앞발부리로 끌어내 본다. 하지만 발등 끼는 터널이 문 밑에 걸려 못 나온다.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신발들이 외치는 탄식조 아무성이 들이는 듯하다.
산산이 흩어진 내 짝이여
뒷발로 뿌려진 내 신세여
허공중에 떴다 떨어진 아픔이여
내 짝을 찾아주세요 그런 사랑 하고 싶어요
남편은 옷을 벗어 걸 때도 소매와 바지 끝이 일직선이다. 그런데 아내가 벗어 놓은 옷들은 마치 벼룩시장 헌 옷더미를 닮았다. 남편은 치약을 쓸 때도 튜브 밑에서부터 밀어낸다. 하지만 아내는 주먹에 잡히는 대로 눌러 짜 쓴다. 어느 영화는 치약 짜 쓰는 문제로 이혼하는 내용이라 했다. 거기에 대보면 이집 부부는 백 번도 더 헤어졌을 터이다.
남편이 가끔 설거지를 한다. 속셈은 시범이다. 맑은 물로 마감한 식기들은 하얀 행주로 물기를 닦아 작은 순서대로 진열한다. 숟가락 젓가락은 입에 닿는 쪽이 위로 올라오게 꽂아 놓는다. 수저통 바닥에 낀 붉은 찌꺼기가 묻을지 몰라서다.
하지만 아내가 하는 설거지 법을 보면 머리에서 회오리바람이 인다. 남편은 빈 그릇에 남은 음식 찌꺼기를 일단 물로 헹궈서 싱크대 바닥에 놓인 개수물그릇 안에 담근다. 그런데 아내가 빈 그릇을 담가 놓은 대야 물은 걸쭉하고 오색찬란하다. 하여간 세제로 닦고 맑은 물 마감한 그릇은 크든 작든 먼저 손에 잡히는 대로 건져 선반 위에 올려놓는다. 그렇게 포개 놓은 그릇 탑은 세계에서 단 한 곳 이집 주방에 있을 뿐이다. 자연이 낳은 삐딱한 탑, 그래도 안 무너지는 그릇탑, 아주 오랜 옛날에 쌓아 올린 고색이 찬연한 예술품 탑, 그러나 지금은 아프고 괴로운 탑으로 서기 일쑤다.
숟가락 젓가락은 주먹에 잡히는 대로 건져 조류 물에 샤워시켜선 그대로 수저통에 꽂는다. 그 과정에서 어떤 놈은 제가 꽂힐 바닥에 발을 붙이지 못한 채 가로 누워 있다. 그 녀석은 서 있는 무리들 사이에 끼어선 ‘누가 나를 내 쉴 곳 내 집안에 좀 꽂아주오.’ 구슬피 노래하는 듯하다.
이 아내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부인이 천생 여자에요.” 한다. 어쩌면 그 이미지가 이 여인의 본 바탕인지 모른다. 적어도 자녀 세 명이 고, 중, 소학교 때만 해도 말이다. 정말 그때까지는 천생 여자 소리를 들을 만했다.
그렇던 여인이 남편의 돈벌이로써는 아이들 키우며 살기가 버겁게 되자 새벽에 우유와 야쿠르트 돌리는 일을 시작했다. 별을 보며 나갔다가 아이들 하교 시간쯤 들어오게 되니 자연히 가사는 빨리빨리, 벼락치기로 해야 했다.
그런 일상이 자그마치 7년, 아내는 번개에 콩 볶는 습관이 굳어졌다. 게다가 병이 한 가지씩 생기더니 이제는 온몸이 종합병원 신세다. 어쨌든 이 부부는 많은 세월을 함께했다. 그동안 남편은 아내가 거칠게 처리하는 일을 못 마땅히 여겨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 탓은 자기가 부족했던 능력 때문이라고 여겨왔다. 하여 물인 자기와 기름인 아내를 한 그릇에 부어 이해라는 스틱으로 저었다. 온힘을 기울여 마구 젓다보면 그 순간순간 만은 물과 기름이 중성으로 변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아내 일손이 거칠다 해서 가족에 대한 정마저 거친 건 아니다. 이미 중년이 된 자식들은 물가에 놓인 어린애 취급한다. 남편에 대한 정성도 둘째가라면 서럽다 할 것이다.
이 커플은 열한 살 나이 차이도 있고 조건상 이루어질 수 없는 인연이었다. 그런대도 그 난관을 극복한 건 여자가 만든 억지 짝 맞추기였다. 부부가 된 지 어언 반세기반, 그동안 남자 몸에 좋다는 음식을 단 하루도 거른 일이 없다. 심지어 외국에 나가 서른 달 동안 있을 때도 몸보신 되는 음식을 끊이지 않고 보냈다.
이 남편은 4년 전 여든한 살 때부터 1주일에 30여 시간 당구를 치고 있다. 이 역시 아내가 늘 달여 주고 담가서 숙성시켜 주는 보약 덕분인가 한다. 분명 성게 속살 같은 아내 덕이라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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