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럭론論 / 임경묵
평생 장남으로, 가장으로, 종손으로 살아온 나의 아버지를 나는 어떤 모습으로 인식하고 있었을까? 사실, 내가 인식하고 대면하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아버지’로 상정되는 존재, 즉 내가 살아온 길을 미리 밟아보았거나 다져놓은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전통을 중시하는 사람답게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대를 잇기 위한 집단으로 인삭하고 있었다. 따라서 장남과의 관계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이 관계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모든 것을 지지하고 공유하며, 사후에도 제사의 형태로 그 관계를 지속하겠다는 무언의 약속이 담겨 있다.
아버지는 장남, 가장, 종손으로서의 책무의 고단함을 달래기 위해 종종 술의 힘을 빌렸다. 술은 폐 속에 직접 열을 넣는 음식으로, 작은 양으로도 단기간에 큰 힘을 발휘하는 효과가 있다. 또한 술은 평소에 말씀이 없는 아버지를 언어의 장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아버지에게 술은 고된 노동이 끝난 후의 허기와 피로를 달래주고 몸과 마음을 위로해줄 뿐 아니라, 술을 마시는 행위를 통해 자신 앞에 놓인 책무를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술과 함께 간혹 ‘버럭’이라는 돌발 행동이 나타나는데, ‘버럭’은 아버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남, 가장, 종손으로서의 책무를 가족과 나누고 싶다는 가장 적극적인 표현 방법의 하나였다. 사전적 의미에서 ‘버럭’은 갑자기 화를 내면서 소리를 높이 지르거나 매우 억지스럽게 기를 쓰는 뜻밖의 방식을 말하는데, 아버지에게 ‘버럭’은 자신이 지닌 책무에 대한 일정한 ‘거리 두기’의 시도이기도 했다. 안면근육을 일제히 확장하면서 천둥 같은 고함과 함께 매우 빠른 속도로 나타나는 ‘버럭’은 혼자 힘으로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고 오늘 잠시 중단된 일상적 행위를 내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시작하겠다는 일종의 다짐이며, 현실에서 장남, 가장, 종손으로 자리매김하려는 몸부림이었다.
봄볕이 며칠째 몽우리를 만지작거리니까
목련이 제 가슴을 확 보여 주었다
애기똥풀도 놀라서 길섶에 꽃을 토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공부가 힘들다고 했더니
아버지가 딱 한 번 버럭 하셨는데
조촐한 세간들이 좁은 마당을 함부로 날아다녔다
그 후로 공부가 힘들지 않았다
오래 참았다가 한 번에 터트리는 것은 아름답다
상수리나무가 빛나는 열매를 내려줄 때는
갈바람이 나무의 뺨을 갑자기 후려칠 때다
그래야 단풍도 붉으락푸르락한다
-졸시, 「버럭론論」 전문
예상하지 못한 힘든 상황과 끊임없이 마주하다 보면 누구나 대상에게 적대감이 생길 수 있다. 아버지는 ‘버럭’을 통해 이 적대감을 스스로 해소했던 것으로 보인다. ‘버럭’은 아버지 내부에 단단한 결로 웅크리고 있다가 기대했던 희망이 순간 무너졌을 때, 대상을 향하여 매우 짧고 강렬하게 밖으로 튀어나온다. 그것으로 끝이다. 아버지의 ‘버럭’은 뒤끝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버럭’은 가족과 아버지 삶 주변의 모든 존재에게 직접 미치기 때문에 단순하지만, 매우 효과적으로 자기 생각과 의지를 알리는 힘을 가졌다. 가족은 아버지의 ‘버럭’을 통해 그다음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혹은,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엇부터 실천에 옮겨야 하는지 아주 짧은 시간에 알아차리고 행동으로 옯길 수 있었다.
내가 젊은 시절에는 ‘버럭’하는 아버지를 이해하는 것이 바늘귀를 통과하기만큼 어려웠다. 그러나 내가 불혹을 휠씬 넘긴 지금 그 바늘귀가 커 보이는 것은 왜일까? 돌이켜보면 장남, 가장, 종손으로서의 자질은 아버지를 둘러싼 가족 공동체가 아버지에게 일방적으로 요구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장남, 가장, 종손이 해야 할 ‘보살핌’의 역할은 아버지를 충분히 장남답게, 가장답게, 종손답게 성장시켰다. 즉 가족 공동체에서 아버지의 역할과 행위들은 어떤 특정 문제들과 스스로 부딪치고 다양한 방식으로 해결하면서 만들어낸 것이다. 남의 몸짓이 아닌 당신의 몸으로 살고, 당신의 몸으로 힘껏 살아낸 결과물이 장남 노릇, 가장 노릇, 종손 노릇이다.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나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버럭’한 것이 30년도 더 지났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공부가 힘들다고 했더니 딱 한 번 ‘버럭’ 했던 아버지, 조촐한 세간들을 좁은 마당에 함부로 날릴 줄 알던 아버지가 이젠 내 곁에 없다. 안타깝게 몇 해 전 당신 생일을 며칠 앞두고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버럭’ 때문에 나는 스스로 내 몸을 움직일 수 있었고, 내 몸으로 힘껏 살아내야 어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평생 남을 탓하지도 남을 미워할 줄도 몰랐던 아버지, 그저 묵묵히 장남, 가장, 종손으로서 책무를 다했던 나의 아버지. 나의 존재와 성장에 필요한 질료의 대부분을 그런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으나, 그것들을 섭취하고 아버지처럼 가장답게, 장남답게, 종손답게 살아가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야 겨우 알게 되었다. 바람 불때마다 단풍이 붉으락 푸르락하는 이 가을에, 오래 참았다가 한 번에 ‘버럭’을 터뜨린 줄 알았던 아버지가 불쑥 그리운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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